파리 강화 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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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세 자주권의 승인.<ref name="김하룡"/>
 
그리고 여기에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탈취한 각종 권익의 반환을 요구하는 조목이 부가되어 있었다.<ref name="김하룡"/> 이 요구 조건 속에는 패전국인 독일이 [[산둥 성산둥성|산둥]] 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식민지적 권익을 중국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리 강화회담에 앞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강조하여 중화민국의 요구를 찬성, 지지함으로써 중국 국민에게 큰 기대를 주었다.<ref name="학문사"/> 그런데, 일본은 21개조 요구 가운데 산둥 문제에 관한 것과 [[돤치루이]] 정권이 [[1918년]]에 일본과 교환한 산둥 문제에 관한 공문을 근거로 산둥 문제는 중·일 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문서상의 증거가 있었던데다가 영국·프랑스 등의 연합국이 1918년의 중일협약을 지지해주기로 일본과 약속했었으므로, 4월 21일의 회담에서 결국 일본 측의 주장이 승인되었다. 일본은 영국, 프랑스와의 비밀협정을 통하여 이에 구 독일 권익은 완전히 일본에 양도하기로 되어 있었다.<ref name="학문사"/> 물론 우드로 윌슨은 이에 반대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강력한 주장에 굴복하게 되었고 중국에 대한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ref name="학문사"/> 산둥 반도 문제에 관한 파리강화회담의 결정을 알리는 전보가 [[1919년]] [[4월 30일]] 베이징(北京)에 퍼졌고, 이어 5월 1~3일 베이징의 신문에 산둥의 권익을 일본에게 빼앗긴 소식과 그 이유가 보도되었고, 이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5·4 운동]])
 
== 베트남의 청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