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개조 요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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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과 체결 과정 ==
 
흑룡회의 영수 [[우치다 료헤이]]는 중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중국 혁명과 공화제를 지지했다.<ref name="왕효추"/> 그가 신해혁명 기간에 쓴 "중국개조론"에서 "일본은 열국(列國)을 지도하여 중국을 개조하는 주도권을 장악해야 하고, 공화 정치를 건설하는 일을 찬성하는 방법으로 중국이 과분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힘껏 고취했다.<ref name="왕효추"/> 그리고 1914년 10월에 기초한 "중국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더욱 철저하에 그가 중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망령된 의도를 드러냈다.<ref name="왕효추"/> 그는 일본과 중국이 비밀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되 조건을 걸어야 한다고 건의했다.<ref name="왕효추"/> 즉, 일본은 중국의 남만주·내몽고·[[산둥 성산둥성|산둥]]·[[푸젠성|푸젠]] 등에서 특수한 권리를 누리고, 중국의 군대·군수공장·해군·재정·교육 등은 모두 일본에게 위탁 처리하고, 중국이 타국에 차관 조차 할양을 할 경우 반드시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ref name="왕효추"/> 사실상 이것은 중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ref name="왕효추"/> 이 의견서는 21개조 요구의 토대가 되었다.<ref name="왕효추"/>
 
일본 제국주의는 이미 당시 중국내에서 다른 유럽 열강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요구를 중국에 강요했는데 이는 1차 세계대전으로 다른 열강들이 중국에 대하여 세력이 후퇴하였고<ref name="글로벌"/> [[군벌 시대]]의 세력다툼으로 중국이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5년 1월 [[가토 다카아키]] [[일본 외무성|일본 외무 대신]]은 [[위안스카이]] 중국 총통에게 21개조의 요구를 제출했다.<ref name="글로벌"/> 그 내용은 [[산둥 성산둥성]]·[[남만주]](南滿州)·동부 [[몽골]](蒙古)에서의 일본의 특수권익 승인, 한야평공사(漢冶萍公司)의 중·일 합변화(合辨化), 중국 옌안의 불할양(不割讓), 중국정부 각 기관·군대에의 일인 고문 고용 등이 주요한 골자였다.<ref name="글로벌"/> 그러나 이는 중국인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또한 구미 열강을 자극하여 국제문제로 번지게 하였다.<ref name="글로벌"/> 중국 정부는 당초 이를 거부했으나 일본이 동년 5월 7일 최후 통첩을 발하자 5월 9일 중국은 이에 굴복하고 요구를 승인했다.<ref name="글로벌"/><ref>백범흠《중국:외교관의 눈으로 보다》늘품플러스(2010) 411쪽 {{ISBN|978-89-93324-15-0}}</ref> 일본은 당시 중화민국의 대총통 [[위안스카이]]에게 이같은 요구를 전달했고 위안은 거의 그대로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서명을 하였다.
 
<제1호 산둥권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