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고급 모바일 편집
편집 요약 없음
139번째 줄:
 
==== 훈몽재 훈학 ====
[[1548년]](명종 3) 봄 어버이를 모시고 처향(妻鄕)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寓居)하였다. 이곳에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재 유지|훈몽]](訓蒙)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군|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제자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조희문(趙希文) 등과 더불어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컬는다일컫는다. 또 상류에는 [[낙덕정|낙덕암]](樂德巖)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낙향해서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自然歌)이다. 이듬해 10월 부친 참봉공 상을 당하여 12월에 고향 [[장성군|장성]]으로 돌아와 맥동 원당골에 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