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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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성 ==
오스트리아와[[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헝가리]] 양국 사이에서 맺어진 협약인 대타협은[[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llang|de|Ausgleich|아우스글라이히}}, {{llang|hu|Kiegyezés|키에제제시}})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반도에서 1859년 일어났던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전쟁]]으로 힘을 잃고 [[1866년]] 프로이센에게[[프로이센 왕국]]에게 [[독일 연방의연방]]의 맹주 자리를 빼앗긴빼앗기면서 시기에국제적 지위가 떨어지고 점차 제국내에서의 위상도 떨어지면서 체결되었다. 대타협으로[[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으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제국]]은 구조는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으로 재편되었으며, 형가리[[헝가리 왕국은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잃어버렸던 자주권을 다시 되찾아올수찾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인 변화의 요인들로는 [[합스부르크가|합스부르크 왕가의 빈으로부터의왕가]]의 통치가 헝가리인들에게 있어서 불만이었다는불만족스러웠다는 점과사실과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의 국가주의자들과[[내셔널리즘|국민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민족주의자]]들이 점점 세력을 얻으며 확장해얻어 나갔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헝가리인들의 불만족은 1848년에서 1849년까지 전개된 헝가리 혁명의혁명을 오스트리아 당국의당국이 탄압으로탄압함으로써 고조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대한 반발은 그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던제기되어 문제였다왔었다.
 
[[1850년대]] 후반,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였던 많은 수의 헝가리인들이 [[합스부르크가|합스부르크 가문의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1713년 국사원칙하에서국사조칙|1713년 헝가리가국사원칙]]하에서 완전한[[헝가리 내부적왕국 (1526년-1867년)|헝가리 왕국]]이 완전한 자치를 할 수 있는 한 외교권과 국방권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국이 공통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의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패패배한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는 헝가리와 제국의 통치를 양분해야 한다는 것을사실을 체념하고 받아들였다. 새로운 [[외무부|외교부]] 장관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인들과의[[마자르인|헝가리인]]들과의 협상을 종결하고 싶어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데악 패랜츠가페렌츠가 이끄는 헝가리인 귀족들과의 협상에 들어갔다. [[1867년]] [[3월 20일]], 페스트에[[페스트]]에 재설립된 헝기리 의회는 제국을 재편하기 위한 새로운 원칙을법률을 [[3월 30일까지30일]]까지 통과되게 하기 위하여 의논에 들어갔다. 같은 해의 [[7월 28일]], 헝가리의 왕이 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포하였다공표하였다.
 
그러나 일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에게[[민족주의|민족주의자]]들에게 대타협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는데,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헝가리 의회의 선거에서 여당인 친타협적인 정당에 투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에서 맺어진 대타협은 사실상 헝가리 왕국 내의 친타협적인 다수 정당의 인기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78년, 1908년 완전히 합병되기 전까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이로 인하여 보스니아 위기가 발생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노비 파자르 지방의 북부 지역은 오스트리아 군대가 보스니아를 완전히 합병하기 전까지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점령하에 놓였었다.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합병은 보스니아의 무슬림 인구로 인하여 이슬람교가 보스니아 주의 공식적인 종교로의 인정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 국명 ==
제국의 명칭은 짧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llang|de|'''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외스터라이히쉬-웅가리쉬 모나르히}},{{llang|hu|'''Osztrák–Magyar Monarchia'''|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이었고, 정식적인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llang|de|'''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 {{llang|hu|'''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이었다. 국제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가장 많이 통용되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k. u. k라는 이름 역시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는 제국이자 왕국이라는 뜻이다. ({{llang|de|Kaiserlich und Königlich|카이저이히 운트 쾨니그리히}} 또한, 쌍두독수리라는 표현도 상징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제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완전한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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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lang|uk|Австро-Угорщина|아우스트로-우호르시나}}
* {{llang|ro|Austro-Ungar|아우스트로-운가르}}
 
== 산업구조 ==
[[파일:Emperor Francis Joseph.jpg|왼쪽|섬네일|[[1905년]] 촬영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모습]]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llang|de|Ausgleich|아우스글라이히}}, {{llang|hu|Kiegyezés|키에제제시}})으로 인하여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제국 의회에 대표된 영토들, [[시스라이타니아]])과 [[헝가리 왕국]]("[[성 이슈트반 왕관령]]", [[트란스라이타니아]]) 양국간의 연방국으로 변하였다. 양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써 공통의 군주를 섬겼다. 국제적인 외교와 국방은 양국간의 협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양국은 [[관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시스라이타니아]] 내에 존재하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에 존재하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크로아티아]]와 같은 지역들은 [[자치구|자치 지구]]로써 자율적인 통치가 가능하였고, 개별적인 독특한 정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문서와,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 문서 참조.)
 
[[오스트리아 제국]]와 [[헝가리 왕국]]의 분단은 너무 뚜렷해서 공통의 [[시민|시민권]]은 없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시민권자이거나 헝가리 시민권자 둘 중 하나였지, 두 국가의 시민권을 지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즉,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여권]]이 항상 따로 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통 여권이 없었다. 하지만,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권도 헝가리 왕국의 여권도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은 [[크로아티아어]]와 [[프랑스어]]로 쓰여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자체 여권을 발급했고, 여권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의 [[국장 (문장)|국장]]이 그려졌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는 또한 귀화와 시민권에 관한 행정적인 [[자주권|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모두 관할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에서 어떤 여권을 사용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헝가리 왕국]]은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헝가리 왕국]]은 항상 별도의 의회를 유지했다. 헝가리 왕국의 행정부와 정부는 [[1848년 헝가리 혁명]] 전까지 대부분 [[오스트리아 제국]]의 정부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헝가리의 중앙 정부는 오스트리아 제국 정부로부터 잘 분리되어 있었다. 헝가리 왕국은 [[브라티슬라바|프레스부르크]]에 있었고 이후 [[부다페스트]]로 이동한 헝가리 중역 위원회와 [[빈]]에 있는 헝가리 왕실 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와 헝가리 의회는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폐쇄되었고,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 이후에 회복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공통의 [[통화]]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양국은 국가 재정적인 면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1527년]] 오스트리아와의 [[동군연합]]이 시작된 이래로 [[헝가리 왕국]]의 정부는 분리되었고 독립적인 예산을 보존할 수 있었다.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헝가리 정부의 예산은 오스트리아 정부와 통합되었고, 헝가리는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 이후에야 별도의 예산을 확보했다. [[1527년]]부터 [[1851년]]까지 [[헝가리 왕국]]은 독자적으로 세관을 통제하였다. 1867년 이후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관세 동맹]] 협정은 매 10년마다 재협상해야 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은 서로 독립적으로 외국과의 상업 조약을 체결했다.
 
[[빈]]은 제국의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했다.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은 전체 인구의 약 57%을 차지하였고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에 비해 경제 자원의 비중이 더 컸다.
 
== 행정 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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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오스트리아 본토 외에도 여러 영토로 구성되었는데, [[1915년]] 이전에는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을 부르는 공식 명칭이 없었으나, 이후로는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이란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제국 회의({{llang|de|Reichsrat|라이히스라트}})는 시스라이타니아의 의회 역할을 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였던 부분 외에 헝가리 왕국이 지배하였던 영토를 '''[[트란스라이타니아]]'''({{llang|de|Transleithanien|트란스라이타니엔}}라고 부르는데 트란스라이타니아도 헝가리 왕국 외의 영토들이 많았고 공식적으로는 ‘신성‘[[성 이슈트반 왕관령|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왕관령]]령’이라’이라 불렸다. 여기서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 왕국의왕국]]의 첫 기독교도 왕이자 성인으로[[성인 (종교)|성인]]으로 추대받은 [[이슈트반 1세|성 이슈트반 대왕]]({{llang|hu|Szent István király|센트 이슈트반 키라이}})을 가리킨다.
[[파일:Austria-Hungary_map.svg|섬네일|541x541픽셀|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성국 ]]
 
=== 행정구역도 및 구성국 목록 ===
{| class="wikitable"
|+시스라이타니아의 구성국
줄 58 ⟶ 72:
|-
|1
|[[보헤미아 왕국]]
독일어: 뵈멘 왕국 (Königreich Böhmen)
|[[프라하]]
|-
|2
|[[부코비나 공국]]
독일어: 부코비나 공국 (Herzogtum Bukowina)
|[[체르니우치]]
|-
|3
|[[케른텐 공국]]
독일어: 케른텐 공국 (Herzogtum Kärnten)
|[[클라겐푸르트]]
|-
|4
|[[크라인 공국]]
독일어: 크라인 공국 (Herzogtum Krain)
|[[류블랴나|류블라냐]]
|-
|5
|[[달마티아 왕국]]
독일어: 달마티엔 왕국 (Königreich Dalmatien)
|[[자다르]]
|-
|6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독일어: 갈리치엔 운트 로도메리엔 왕국 (Königreich Galizien und Lodomerien)
|[[리비우]]
|-
|6-1
|[[크라쿠프 대공국]]
독일어: 크라카우 대공국 (Großherzogtum Krakau)
|[[크라쿠프]]
|-
|7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독일어: 외스터라이히 연안 지대 (Österreichisches Küstenland)
|[[트리에스테]]
|-
|7-1
|[[트리에스테|트리에스테 제국직할 도시]]
독일어: 트리에스트 제국직할 도시 (Reichsunmittelbare Stadt Triest)
|[[트리에스테]]
|-
|7-2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
독일어: 괴르츠 운트 그라디스카 후백국 (Gefürstete Grafschaft Görz und Gradisca)
|[[고리치아]]
|-
|7-3
|[[이스트리아 백국|이스트리아 변경백국]]
독일어: 이스트리엔 변경백국 (Markgrafschaft Istrien)
|[[포레치]]
|-
|8
|[[오스트리아 대공국|하오스트리아 대공국]]
독일어: 니더외스터라이히 대공국 (Erzherzogtum Niederösterreich)
|[[]]
|-
|9
|[[모라바 변경백국]]
독일어: 메렌 변경백국 (Markgrafschaft Mähren)
|[[브르노]]
|-
|10
|[[잘츠부르크 공국]]
독일어: 잘츠부르크 공국 (Herzogtum Salzburg)
|[[잘츠부르크]]
|-
|11
|[[오스트리아령 실레시아|상실레시아-하실레시아 공국]]
독일어: 상실레시아-하실레시아 공국 (Herzogtum Ober- und Niederschlesien)
|[[오파바]]
|-
|12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독일어: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Herzogtum Steiermark)
|[[그라츠]]
|-
|13
|[[티롤 백국후백국]]
독일어: 티롤 백국후백국 (Gefürstete Grafschaft Tirol)
|[[인스브루크|인스부르크]]
|-
|14
|[[오스트리아 대공국|상오스트리아 대공국]]
독일어: 오버외스터라이히 대공국 (Erzherzogtum Oberösterreich)
|[[린츠]]
|-
|15
|[[포어아를베르크주|포어아를베르크 주]]
독일어: 포어아를베르크 주 (Land Vorarlberg)
|[[브레겐츠]]
|}
{| class="wikitable"
줄 159 ⟶ 173:
|-
|16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왕국]]
헝가리어: 머저르 왕국 (Magyar Királyság)
|[[부다페스트]]
|-
|17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헝가리어: 호르바트-슬라본 왕국 (Horvát-Szlavón Királyság)
|[[자그레브]]
|-
|18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독일어: 보스니엔 운트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Kondominium Bosnien und Herzegowina)
 
헝가리어: 보스니아 에스 헤르체고비너이 공동통치령 (Bosznia és Hercegovinai Condominium)
|[[사라예보]]
|}
 
줄 185 ⟶ 199: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자들은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병력의 90%가 손실을 입었으며(이 중 대부분이 포로), 이는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수치이다. 120만 명이 전사하였고, 36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당시 주력소총 만리허 m.95소총,권총류는 Frommer stop권총 과 Gasser1870리볼버,그리고 슈타이어M1912권총이 있었다.
 
== 산업 ==
{{빈 문단}}
 
== 문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