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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北宋)에서 중서성의 장관은 문하성이나 [[상서성]](尚書省)과 같은 실무 관직이라기보다는 공신(功臣)의 사망 뒤에 추증하는 것으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원나라|원]](元) 왕조에서 중서성은 중앙정부의 통치기관이자 각 지방에도 똑같은 형태로 '''[[행중서성'''('''行中書省''')]]이 설치되었다. 행성(行省)이라고 불린 이것은 오늘날로 중국의 지방행정 구역의 하나인 [[성]](省)의 기원이 되었다. 다만 미타무라 다이스케(三田村泰助)의 지적대로, 원 왕조의 「중서성」은 [[몽골]]의 전통적인 집정부였던 에케 쟈르구치(대법관)나 에케 비치그치(대서기관)의 한인(漢人) 관료에 대한 단어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가사사 마사아키(笠沙雅章)는 그 직무도 조칙의 기초에 그치지 않고 군정을 맡는 추밀원(枢密院)과 감찰 및 사법 기관인 어사대(御史台)를 제외한 모든 정치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즉 당대의 중서성과는 전혀 다른 기구로 변질된 것이다.
 
명 왕조를 세운 [[홍무제]](洪武帝)도 초기에는 중서성을 그대로 두고 그 장관인 승상(丞相)을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홍무]](洪武) 13년([[1380년]])에 일어난 이른바 [[호유용]](胡惟庸)의 옥(獄)을 계기로 중서성을 없애버렸다. 홍무제의 중서성 폐지는 승상을 비롯한 일체의 재상직을 없애버렸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재상이 사라진 뒤 6부의 장관인 6상서는 황제의 직접명령을 받게 되고, 황제 독재체제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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