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다이라 사다노부 (175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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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atsudaira Sadanobu 2.jpg|섬네일|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llang|ja|松平定信}}, [[1759년]] [[1월 15일]] ~ [[1829년]] [[6월 14일]])는 [[에도 시대]] 중기의 [[다이묘]]이다. [[무쓰국|무쓰]] [[시라카와번]] 제3대 번주를 지냈다. [[에도 막부]]에선 [[노중]]을 맡았다. [[마쓰다이라 사다쓰나|사다쓰나계]] [[히사마쓰씨|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定綱系久松松平家) 제9대 당주. 아명은 '''가시코마루'''({{lang|ja|賢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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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조부는 에도 막부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이며 친부는 [[다야스 도쿠가와가]]의 당주 [[도쿠가와 무네타케|다야스 무네타케]]이다. 어릴적부터 총명함을 발휘해 병약하고 범용한 친형 [[도쿠가와 하루사토|하루사토]] 대신 다야스가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고, 제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의 후계자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사다노부는 당시의 실권자 [[다누마 오키쓰구]]의 정치를 '뇌물 정치'라고 비판하였고, 다누마의 권세를 두려워한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의 당주 [[도쿠가와 하루사다 (1751년)|히토쓰바시 하루사다]]에 의해 [[1774년]] [[시라카와 번]]주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1728년)|마쓰다이라 사다쿠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되었다.
 
[[덴메이 대기근]]이 한창이던 [[1783년]]에 [[시라카와번]]주가시라카와 번주가 되었다. 기근으로 고통받는 영지의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일단 자신부터 솔선수범하여 검약에 힘썼고, 백성에 대한 식량 구호 대책을 신속히 수립하여 시라카와 번에서는 기근으로 인한 아사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도호쿠 지방]]에서 대기근의 피해가 심했던 것에 비해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또한 서민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 학문을 권장했다. 정치 수완을 인정받은 사다노부는 [[1786년]]에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하고 다누마 오키쓰구가 실각하자 [[1787년]]에 [[도쿠가와 고산케|고산케]]의 추천을 받아 어린 신임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보좌역 겸 [[로주]] 수좌를 맡게 되었다. 그는 막부로부터 다누마 일파를 몰아내고 쇼군 요시무네의 [[교호 개혁]]을 모범으로 삼아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여 막부의 재건을 꾀하였다.
 
사다노부는 전임 다누마 정권이 중상주의 정책과 이권 뇌물 정치를 편것에편 것에 반해, 주자학에 기반을 둔 [[중농주의]]에중농주의에 입각하여, [[기근 대책]], [[검약령]], 뇌물 인사 폐지, [[하타모토]]에 대한 [[문무 장려]] 등을 시행하여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개혁 자체는 형식적인 부분이 많았으며 근본적 문제 해결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처사횡단]]의처사횡단의 [[금령]]을금령을 내려 [[하야시 시헤이]] 등의 여론 선동을 금지했고, [[간세이 이학 금령]]을 통해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삼고 [[난학]]을 단속했다. [[다이코쿠야 고타유]] 등 일본인 표류민들을 반환하면서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한 [[러시아]]의러시아의 [[아담 락스만]]에 대해서는 한정적인 통상을 시사하고, 그동안 금지되었던 표류민 수용을 용인하였으나, 대신 [[에도 만에도만]]을 비롯한 해상의 방비 강화에 힘썼다. 또한 [[조선통신사]]의 규모도 축소했다.
 
[[대정위임론]]을 펴서 조정의 권위를 막부에 이용하려 했던 사다노부는, [[고카쿠 천황]]이 친아버지에게친부에게 태상천황의 칭호를 올리려는 것에 대해 [[주자학]]에 입각하여 반대하였고, 이 [[존호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 히토쓰바시 하루사다에게 [[오고쇼]]의 존호를 올리려던 쇼군 이에나리와 대립하였고, 결국 [[1793년]], 해상 방어를 위해 출장중일 때 사직 명령을 받았다. 사다노부는 이때 은퇴하였지만 [[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오코치 마쓰다이라가)|마쓰다이라 노부아키라]], [[마키노 다다키요 (1760년)|마키노 다다키요]] 등 사다노부파 로주들은 그대로 유임되어 사다노부의 정책을 계승했다. 실각한 사다노부는 시라카와 번 경영에 전념했고, 산지가 많아 실제 수입이 적은 번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말 생산을 장려하였고, 민정에 진력하여 명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1810년]], 로주 재임 당시에 계획한 에도 만 경비가 실시되면서 그 최초의 주둔 임무가 주창자인 사다노부가 있는 시라카와 번에 내려졌고, 이로 인해 재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1812년]], 가문을 장남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1791년)|사다나가]]에게 계승하게 하고 은퇴했지만, 번의 실권은 여전히 쥐고 있었다. 사다나가 재임 때 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의 옛 영지인 [[구와나번구와나 번]]으로 영지를 바꾸게 된 것도 사다노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1829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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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1728년)|마쓰다이라 사다쿠니]]
|후임자 = [[마쓰다이라 사다나가 (1791년)|마쓰다이라 사다나가]]
|직책 = [[시라카와번]] 번주 (히사마쓰 마쓰다이라가)
|대수 = 3
|임기 = [[1783년]] ~ [[1812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