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뤼흐 스피노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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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632년 11월 24일
|출생지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사망일 =
|사망지 = [[네덜란드]] [[헤이그]]
|학파 = [[결정론]], [[객관적 관념론]], [[공화주의]], [[범신론]], [[스토아 학파]], [[유물론]], [[일원론]], [[정합주의]], [[합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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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너비 =
}}
'''바뤼흐 스피노자'''({{Llang|nl|Baruch Spinoza}}, {{Llang|la|Benedictus de Spinoza}}, {{Llang|he|ברוך שפינוזה}}, {{Llang|pt|Bento de Espinoza}}, [[1632년]] [[11월 24일]] ~ [[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생활해, 유대 문화에 대해 정통하였으나 비판적인 사상 때문에 유대인 랍비들은 스피노자에게 제명 조치하고, 23살 때에 스피노자는 유대 사회에서 추방되었다.<ref name=tws908/><ref name=tws9909/> 또 스피노자의 모든 저작은 가톨릭 교회의 [[금서 목록]]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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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년 <신학 정치론>을 익명으로 출판하였다가 유대 사회의 심각한 비난을 받았다. 도처를 돌아다니며 살던 그는 그해 [[헤이그]]에 정착하여, 1675년 필생의 저작인 <[[에티카|윤리학]]>를 완성하였으나, <신학 정치론>에 대한 유대 및 가톨릭 사회의 악평 때문에 생전에 출판하지 못하였다. 이 책은 [[기하학]]의 논증법을 응용하여 윤리학을 정리, 공리계(係) 등으로 체계 지은 것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안경 렌즈를 연마(硏磨)하는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당시 독일 최고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자유로운 철학 활동을 보장하지 않는 곳에서는 재직할 이유가 없다면서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등 철학자로서 교훈이 되는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는 처절한 고독과 빈곤 속에서
그의 학설은 방법론에 있어서는 [[기하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세계관에 있어서는 무신론적 성향이 강한 일원론적 범신론이었다. 독일 [[관념론]]에 큰 영향을 끼쳤고, 계몽주의,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레싱은 "스피노자 철학 외에는 진정한 철학이 없었다"고 할 만큼 격찬했다. 반면 유신론자들에게는 "신을 모독한 저주받을 무신론자"로 비난도 받아야 했다. 그 밖의 저서로 「지성 개선론」 「국가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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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렬:스피노자, 바뤼흐}}
[[분류:1632년 태어남]]
[[분류:
[[분류:네덜란드의 철학자]]
[[분류:네덜란드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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