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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이 친일밀정인지 정부와 학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섰고 결론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서 친일파에 분류되지 않는 인물로 결론이 났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백범일지에는 옥관빈이 언급되나 옥관빈을 친일파나 밀정으로 분류하지 않는다.<ref name=":442">김구,도진순, 《백범일지》,돌베개,2002</ref>{{독자 연구(단, 문장|날짜=}}'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ref name=":452">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18</ref>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관빈은 예비후보부터 제외되어 친일반민족행위로 분류되지 않았다. .<ref name=":462">《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2,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3, 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4, 2009</ref>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 name=":472">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420</ref>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 name=":48">《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ref> 편찬결과물에 옥관빈이 제외되었다.<ref name=":49">《친일인명사전 1》;《친일인명사전 2》;《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ref>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란 객관적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ref name=":50">{{웹 인용|url=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89220&PAGE_CD=S0200|제목=친일인명사전 예비명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로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출처|날짜=}}.
 
옥관빈이 친일밀정이라 주장한 이는 정화암으로 친일인명사전 "주요전거" 중 정화암의 증언이 포함되었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5~1037</ref> ("전거"는 증거가 아니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8ed81010077e478a9a3f02fd58ebfe64|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10-24}}</ref>)150여명의 학자들이 편찬위원을 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 측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친일인명사전 3》, 민족문제연구소, 2009, 1038~1042</ref> 그 결과{{출처|날짜=}} 옥관빈은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어 분류되지 않았다.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해 옥관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출처|날짜=}}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되지 않았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또한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이 원인이란 가설은 어디에도 확인이 되지않는다. 구글학술검색에 의하면 옥관빈이 논란이 되는 건 밀정여부로만 나오며 밀정이 아닌 "친일숙청"원인설은 확인되지 않는다.<ref>검색결과 2020년 10월 18</ref> 구글 학술검색은 논문 검색 사이트이다.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0f8b56629df44c009c39eeb4ecbadf4e|제목=네이버백과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일}}</ref>{{독자 연구 문장|날짜=}}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93449b71482c41d885e831275e9a9ee7|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일}}</ref> 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음'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지 않는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것이라 설명된다.{{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옥관빈이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증거불충분'이란 용어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증거불충분'은 오직 법률용어이며 법률 외에는 적용되지 않는 용어개념이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0f8b56629df44c009c39eeb4ecbadf4e|제목=네이버백과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일}}</ref>{{독자 연구 문장|날짜=}} 그리고 '증거'의 1번의 의미이자 법률 외의 의미는 '증명하는 근거'란 의미이다. "실을 인정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재료"라는 의미는 오직 법률 용어이다.<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93449b71482c41d885e831275e9a9ee7|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일}}</ref> 법률 외 용어개념을 기준으로 옥관빈은 '증거없음'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 실제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지 않는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는 것이라 설명된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명백히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nowiki/>' 수록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수록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blockquote>사전 수록은 오로지 선정기준에 따를 뿐이며 일부의 형평성을 잃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사전에는 다수의 좌파 인물이나 월북 인사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객관적 증거가 확보되고 기준에 부합한다면''' 어떤 인물이라도 사전에 등재한다는등재한다'''는 것이 편찬위원회의 일관된 방침입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785|제목=좌익이나 북한과 관련된 인사들에게는 관대하다는 비판에 대해서|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3일}}</ref></blockquote>수록되지 않으 인물은 객관적 증거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편찬위원회는 수록되지 않는 인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blockquote>연구소와 편찬위원회는 이의신청 사유가 다소라도 개연성이 있어 보이면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자 했다. 설령 이의신청이 없더라도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 검증을 거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3일}}</ref></blockquote>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단 한 명의 부당한 오명을 쓴 사람이 발생하지 않도록"이 이유라 설명하였다.
 
옥관빈이 친일파란 주장하는 전거가 검토됐음에도 옥관빈은 수록되지 않았다. 옥관빈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며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소수파{{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2008년]] [[이호룡]]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성=이호룡|이름=|날짜=2008년 8월 11일|판=|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70|장=}}</ref>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02" />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392">{{서적 인용|제목=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성=윤대원|이름=|날짜=2018년 02월 00일|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21|장=}}</ref>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69&aid=0000363781&sid1=001|제목=김구의 지령 받고 이중첩자로 활약한 애국지사 한도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일보}}</ref>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373">{{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1071292&sid1=001|제목=③무명의 독립운동가들|성=|이름=|날짜=2005-08-10|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그러나 손세일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ref>{{독자 연구 문장|날짜=}}
옥관빈이 친일파란 주장하는 전거가 검토됐음에도 옥관빈은 수록되지 않았다. 옥관빈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도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며 친일반민족행위나 부역자로 분류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ref name=":382">{{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17-218|장=}}</ref>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소수파{{독자 연구 문장|날짜=}}의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2008년]] [[이호룡]]은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성=이호룡|이름=|날짜=2008년 8월 11일|판=|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70|장=}}</ref>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02" />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392">{{서적 인용|제목=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성=윤대원|이름=|날짜=2018년 02월 00일|판=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1집|출판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쪽=121|장=}}</ref> [[2019년]] [[2월 12일]] [[한국일보]] 보도에는 "무장항일을 지향했던 맹혈단은 일제 밀정 옥관빈을 사살하고, (후략)"라고 기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69&aid=0000363781&sid1=001|제목=김구의 지령 받고 이중첩자로 활약한 애국지사 한도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일보}}</ref>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ref name=":382">{{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17-218|장=}}</ref> 한홍구는 옥관빈에 대해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ref name=":382" /> 고만 서술할 뿐, 학계의 합의{{출처|날짜=}}에 의하면 "친일"행위 존재 자체는 친일파의 판단 증거가 아니며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며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0일}}</ref>{{독자 연구 문장|날짜=}} 그러므로 단순히 "친일"행위 언급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는데{{독자 연구 문장|날짜=}} 한홍구의 논문에선 옥관빈을 "밀정" "밀고"나 "친일파"로 기술하는 내용은 없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2006년]] [[손세일]]은 "(1933년경)옥관빈은 친일파로 변신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373">{{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1071292&sid1=001|제목=③무명의 독립운동가들|성=|이름=|날짜=2005-08-10|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그러나 손세일은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다.<ref>[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에 政界에 투신해, 11·14·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會通商産業委員長, 國民會議 정책위 의장, 원내총무, 전당대회 의장, 韓日議員聯盟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ref>
 
기타로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관빈이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여 관계가 좋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어 결국 1933년 서간단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기술하며 독립운동가들과의 관계악화를 옥관빈의 처형 이유로 기술하며 친일파나 밀정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ref name=":382">{{서적 인용|제목=김두봉: 혁명가가 된 한글학자|성=한홍구|이름=|날짜=2010년 08월 00일|판=한국사 시민강좌 제47집|출판사=일조각|쪽=217-218|장=}}</ref> 한홍구는 옥관빈에 대해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ref name=":382" /> 고만 서술할 뿐, 학계의 합의{{출처|날짜=}}에 의하면 "친일"행위 존재 자체는 친일파의 판단 증거가 아니며 "반복성과 중복성·지속성 여부도 주된 참고사항"이며 "친일단체 참여 등 협력행위가 일회적이라면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0일}}</ref>{{독자 연구 문장|날짜=}} 그러므로 단순히 "친일"행위 언급만으로 친일파로 규정되지 않는데{{독자 연구 문장|날짜=}} 한홍구의 논문에선 옥관빈을 "밀정" "밀고"나 "친일파"로 기술하는 내용은 없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해 옥관빈이 사살됐는데 김구 일파의 주장에 의하면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했다하며<ref name=":332" /> [[1936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362" />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양측이 인식한 "친일"이 현대 한국에 통용되는 "친일" 용례와 같은지는 전문가의 견해없이는 알 수가 없다.{{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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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ref name=":53">{{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28e944fae422448d884eb1cc04c87768|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년10월24}}</ref>
</blockquote>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표준국어사전에 의하면 "친일파"는<blockquote>
* 1.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
*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한 무리.<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311660d7538e4788896f91e2f59e0c30|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2020-10-24}}</ref>
</blockquote>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국어사전에 의하면 본래 친일, 친일파 ≠ 한국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친일, 친일파(2번 의미)는 차이가 있으며{{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전문가의 분석없이 비전문가의 가설은 위키백과에서 금지하고 있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본래 친일(親日)이라는 단어 자체는‘일본과 친하다’라는 중립적인 의미를 지닌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현대 한국 내의 '친일'은 본래 의미와 다른 의미이다. <ref>김다혜, 친일파 및 친일 행위 내용에 관한 초등학교 사회과 교과서 서술 분석, 서울교육대학교 교육전문대학원, 2018, 10~11</ref>{{출처 필요 문장|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해당 논문의 정의는정의{{출처 필요 문장|날짜=}}는 표준국어사전과 일치하는 용례이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표준국어사전은 친일을 "1. 일본과 친하게 지냄",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와 야합하여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추종함"라고 이분적인 정의를 내렸다.<ref name=":53" /> 그러므로 '친일'언급만으로는 현대 한국 내 통용되는 친일파라는 의미인지 알 수 없다.{{출처|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두가지 의미라 나온다.<blockquote>사전적인 의미에서 따져보면 반민족행위자란 민족을 반역한 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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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 국사편찬위원회의 <반민특위 특별조사부 조사 기록> 해제<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ntroduction/intro_an.html|제목=반민특위조사기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 <ref name=":5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an&fileName=intro_an.pdf|제목=반민특위조사기록 해제 PDF|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다른 두가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에 국사편찬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친일파)"라고 명시하였다.<ref name=":54" />
- 국사편찬위원회의 <반민특위 특별조사부 조사 기록> 해제
 
그리고 국사편찬위원회는 해당 문서에서 "반민족행위자(친일파)"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54" />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ntroduction/intro_an.html|제목=반민특위조사기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an&fileName=intro_an.pdf|제목=반민특위조사기록 해제 PDF|성=|이름=|날짜=|웹사이트=국사편찬위원회|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친일파란 일본에 우호적 이고 일본문화를 찬양하는 자 또는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반역한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면서 다른 두가지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되는 "친일"은 일제의 침략을 당한 일반인의 기준이다.<blockquote>"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18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ref name=":55">{{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일반인의이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blockquote>토의결과 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인 해방공간은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자를 강도 있게 비판할 때 널리 사용되었던 ‘친일파’란 용어를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고, 사전 명칭도 원안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ref name=":55" /></blockquote>"일반인"의 국어사전 의미는<blockquote>"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f68ff92ab0ae437f8f22c30fb4da4ac0|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김구 일파"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니깐 일반인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특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해당되지 않는다.{{출처 필요 문장|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대한민국]] 역사를 전공한 중국인 박사 1호인 쑨커즈(孫科志)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성빈(玉成彬), 관빈(觀彬) 형제는 원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악랄한 친일분자로 변절한 뒤 [[상하이시|상하이]]에 눌러앉았으며 일부 [[친일파]]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에 투항하도록 선전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자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병인의용대(丙寅義勇대)나 의경대 등을 조직해 암살활동을 펴기도 했다'고 하였다.<ref name=":51" /> 애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애초에 일본인으로서, 친일인명사전에 설명하는 친일은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인데 일본인은 일제에게 침략당한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예 해당되지 않는다.{{출처 필요 문장|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즉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하는 "친일"은 일본인이 인식하는 "친일"이 아니라 피침략된 조선의 일반인이다.{{출처 필요 문장|날짜=}}{{독자 연구 문장|날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그 직후인 해방공간은 물론 최근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자를 강도 있게 비판할 때 널리 사용되었던 ‘친일파’란 용어를 그 역사성을 고려하여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고, 사전 명칭도 원안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라고 하였다.<ref name=":55" />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ref>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독자 연구 문장|날짜=}}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ref> [[대한민국]] 역사를 전공한 중국인 박사 1호인 쑨커즈(孫科志)는 자신의 논문에서 '옥성빈(玉成彬), 관빈(觀彬) 형제는 원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악랄한 친일분자로 변절한 뒤 [[상하이시|상하이]]에 눌러앉았으며 일부 [[친일파]]는 중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일제에 투항하도록 선전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이처럼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자 독립운동 세력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병인의용대(丙寅義勇대)나 의경대 등을 조직해 암살활동을 펴기도 했다'고 하였다.<ref name=":51" />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blockquote>20. 경제
참고로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되는 "친일"은 일제의 침략을 당한 일반인의 기준이다.<blockquote>"친일파란 용어는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로서,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18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친일파의 범주는 위로는 매국행위의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의 지위를 차지한 자로부터 아래로는 공출·징용·징병 등의 말단 집행자로서 직접 민중과 적대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선 면서기·순사 등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매우 넓었다. 당시의 관점에 따르면 친일파는 상하 유형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 부역자를 지칭했던 것으로 이해된다."<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801|제목=『친일인명사전』편찬의 쟁점과 의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일반인의 국어사전 의미는<blockquote>"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ref>{{웹 인용|url=https://ko.dict.naver.com/#/entry/koko/f68ff92ab0ae437f8f22c30fb4da4ac0|제목=표준국어대사전|성=|이름=|날짜=|웹사이트=네이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2월 4일}}</ref></blockquote>"김구 일파"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니깐 일반인 범주에 해당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특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해당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애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애초에 일본인으로서, 친일인명사전에 설명하는 친일은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인구에 회자되었던 관행어"인데 일본인은 일제에게 침략당한 당사자가 아니라서 아예 해당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즉 친일인명사전에서 설명하는 "친일"은 일본인이 인식하는 "친일"이 아니라 피침략된 조선의 일반인이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옥관빈은 조상이 화교출신인 한국계 중국인이다. "옥관빈은 다른 상해의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28년 그는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국적 회복을 인정받았다. 그는 그 과정에서 새로이 중국 국적을 얻는다는 ‘입적’이 아니고 원래의 중국 국적을 되찾는다는 의미의 '복적'이라는 방법을 취하였다. 즉 자신은 조부 때 중국 윈난에서 평양으로 이거한 화교라는 것이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66</ref> 중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실업가의 행적을 한간(매국노, 반역자, 무역자)으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중국에서 "그는 불자약창을 설립하여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서 평가되고 있다."<ref>김광재, 옥관빈의 상해 망명과 활동, 한국근현대사연구 59, 2011, 47</ref> 한국에서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를 친일반역자/부역자로 분류하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었다.{{독자 연구 문장|날짜=}}<blockquote>20. 경제
 
20-1. 일제의 경제침탈정책을 입안 또는 의사 결정을 주도한 자와 이의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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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기고ㆍ광고ㆍ좌담ㆍ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경제침탈을 합리화하고, 전쟁 물자 동원에 적극 협력한 자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분류기준 경제부문)<ref>{{웹 인용|url=https://www.minjok.or.kr/archives/63799|제목=친일파를 분류하기 위해 모두 24개 분야를 설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친일인명사전|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0일}}</ref></blockquote>친일인명사전의 경제부문 친일파 기준을 확인해보아도 한국계 중국인 실업가가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친일파(반역자/부역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옥관빈의 경제활동은 중국에서는 한간이 아닌 "중약을 근대화한 중국의 애국적인 실업가"로 평가받으며{{출처|날짜=}} 친일인명사전의 친일파 기준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옥관빈의 암살범을 찾으려는 옥성빈도 암살됐다. 역사학자가 아닌 언론인인 손세일은 옥성빈도 친일파라 주장하였다. <ref>{{웹 인용|url=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609100025|제목=蔣介石과 面談하고 洛陽軍官학교에 韓人특별반 설치|성=손세일|이름=|날짜=|웹사이트=조선일보|출판사=|확인날짜=2020년 11월 24일}}</ref>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이 주장되는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ref name=":442" />{{독자 연구 문장|날짜=}}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대한민국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대통령 소속으로서 위원장 1명, 상임위원 1명, 위원 9명 등 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ref name=":452"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규명결과에서 옥성빈이 예비에서 제외되었다.<ref name=":462" />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연구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하고, 180여 명의 집필위원, 문헌자료 담당 연구자 80여 명이 관여하여 총 3천여종의 일제강점기 원사료와 데이터베이스 450여 종 등 기초자료를 활용하여 인물 정보를 구축한 친일인명사전<ref name=":472" />은 2001년 7월 20일에 1차 전체회의를 시작으로 2009년 9월 2일까지 8년동안 회의를 하였다.<ref name=":48" /> 편찬결과물에 옥성빈이 제외되었다.<ref name=":49" /> 친일파란 증거가 없으므로 예비후보에도 제외되었다.<ref name=":50" /> 최종출판물에서 제외된 케이스가 아닌 예비 후보에서부터 제외된 케이스다. 대한민국 정부의 보고서와 전문연구자 150여명이 참여한 조사와 진상규명결과에 의하면 옥성빈 친일파설이나 밀정설은 객관적 증거가 없고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독자 연구 문장|날짜=}} (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1935년]]경 [[일본 제국]]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ref name=":3323" /> [[1936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111" /> [[2008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호룡]]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일본 제국|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6" />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4" />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74" />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자신의 논문에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45" /> [[옥관빈]]은 2009년 발행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에는 미등재되었다(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 임시정부 이동시기 (1932~1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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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관빈]]이 암살되자 [[옥성빈]]은 동생을 살해한 범인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 역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있던 [[친일파]]였다. [[옥성빈]]도 넉 달 뒤인 [[1933년]] [[12월 18일]] 오후 6시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해산(金海山)의 집 입구 길가에서 암살되었다.<ref name=":39" /><ref>{{서적 인용|제목=절대적 자유를 향한 반역의 역사 (한국 아나키즘을 돌아본다)|성=이호룡|이름=|날짜=2008-02-20|판=|출판사=서해문집|쪽=94|장=}}</ref><ref name=":74" />
 
[[1935년]]경 [[일본 제국]]의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함. [[옥관빈]]은 三德洋行 주인으로서 상당히 축재를 한 자인데 불령선인 등에 대한 자금 등을 제공하지 않고 친일적 태도를 가진 자라 하여 권총으로 사살함."<ref name=":3323" /> [[1936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옥관빈]]을 친일조선인(親日鮮人)이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111" /> [[2008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호룡]]은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에 "[[일본 제국|일제]]의 밀정 노릇을 한 [[옥관빈]]을 사살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6" /> [[2010년]] 8월 [[한홍구]]는 자신의 논문에 "[[옥관빈]]은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종사하였지만, 부를 축적한 이후, 친일의 길에 들어섰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44" /> [[2011년]] [[국사편찬위원회]] [[김광재]]는 자신의 논문에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어져 한국에서 [[옥관빈]]은 [[친일파]], 변절자, 밀정 등으로 낙인이 찍혀 기피인물이 되었다"고 기술하였다.<ref name=":74" /> [[2018년]] 2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윤대원]]은 자신의 논문에 "[[정화암]]을 비롯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미 [[옥관빈]] 등 [[친일파]] 등을 암살한 경험이 있고"라고 기술하였다.<ref name=":45" /> [[옥관빈]]은 2009년 발행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에는 미등재되었다(단, '등재되지 않았음'을 '[[친일파]]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처럼 전제가 참(또는 거짓)으로 증명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거짓(또는 참)을 주장하는 것은 [[무지에 호소하는 논증]]임에 주의할 것).
 
===== 김원봉과의 갈등과 한국국민당 창립 (1935~19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