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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전봉준'''(全琫準, [[1855년]] [[1월 10일]]([[1854년]] [[음력 12월 3일]]) ~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은 [[조선]]의 농민 운동가이자 [[천도교|동학]]의 종교 지도자였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남접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천안 전씨|천안]](天安), 초명은 명숙(明淑), 다른 이름은 영준(永準)이며 호는 해몽(海夢)이다. '''녹두장군'''(綠豆將軍)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키가 작아 붙여진 별명이다.
 
[[1890년]]대 초 한때 [[흥선대원군]] 문하의 식객으로 있었다.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병갑]]을 몰아내고 1차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조정의 회유책으로 해산했다가,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 (1854년)|이용태]](李容泰)가 동학 농민군을 도적으로 규정하여 동비(東匪)라 칭한 뒤, 동학군과 협력자를 처벌, 처형하고 관련없는 농민들까지 동비로 몰아 처단하자 다시 봉기를 일으킨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온건파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이자 농민군의 북접을 지휘하였으며, 거사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하여 연결을 시도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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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 체격 ===
전봉준은 키가 152cm이며 이는 현재도 물론이거니와 당대 기준으로도 매우 작은 체격이였다. 그래서 붙은 전봉준의 별명이 '''녹두장군(綠豆將軍)'''이였다.
* [[1959년]] [[4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전봉준을 소재로 한 액면가 2전 우표를 발행하였다.
*전봉준이 교수형에 처한 이후 백성들은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전봉준에 대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