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중국인 학살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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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만력37년) 중국상인들이 세금 수취가 과중한 것을 이유로 항의하다가 2만여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로써 1차 학살사건과 함께 5만여명의 중국상인들이 스페인인들에게 학살당하였다. 스페인인들은 당시 명조정부에게 보복하려 하였고 마카오(Macao)로 정탐병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만력제는 여송에 오래 거주한 상인들은 명의 백성이 아니라고 보고 일을 무마시켰다.
 
== 제3차1639년 학살사건(1639) ==
1639년(숭정12년), 스페인인들이 중국인들에게 강제로 고가의 신분증세와 조세를 거두자, 중국인들이 이에 반항하였고, 스페인인들은 다시 중국인들을 학살하였다. 이 시기 명조는 아편흡입이 만연하고 섬서(陝西), 하남(河南), 산동(山東) 등지에는 황충과 기근, 가뭄이 들었다. [[이자성]](李自成)과 [[장헌충]](張獻忠)이 각각 하남과 호북(湖北)에서 기의하면서 민란이 발생하였고, 명조는 여송으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1654년(순치11년), 산토도밍고(Santo Domingo)회 소속 이탈리아 신부 리치오(Victorio Riccio, 李科羅)가 마닐라에서 [[정성공]](鄭成功)의 지배에 있었던 [[샤먼시|하문]](廈門, 오늘날 샤먼)으로 가서 교회를 세웠다. 정성공은 리치오로부터 스페인인들의 만행을 듣고서, 루손에 사신을 보내어서 항복을 권유하였으며, 거절할 경우 공격하겠다고 전하였다. 당시 루손의 중국인들은 수십 만명에 달하였으며 정성공이 주둔한 대만 인구보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