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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이름 = 이효석
|그림 =
|크기 =
|그림설명 =
|출생일 = {{출생일|1907|4|5}}
|출생지 = [[일제강점기]] [[강원도 (남)|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
|사망일 = {{사망일과 만나이|1942|5|25|1907|4|5}}
|사망지 =
|사망원인 =
|거주지 =
|국적 =
|성별 =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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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국어학자
|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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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친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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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웹사이트 =
}}
 
 
'''이효석'''(李孝石, [[1907년]] [[4월 5일]] ([[1907년]] [[음력 2월 23일]])<ref>[http://www.up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52488#07Pk 링크]</ref> - [[1942년]] [[5월 25일]])은 [[일제 강점기]]의 작가, 언론인, 수필가, 시인이다. 한때 [[숭실전문학교]]의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호는 가산(可山)이며, [[강원]] [[평창]](平昌) 출생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소설]] 작가이다.
 
== 생애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의 본마을에서 태어나 1914년 8세때7세때 외학을 하게되어 봉평에서 100리가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 (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졸업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다.
<br />
=== 주요 활동 ===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나왔다. 이때 만난 친구로는 영문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한 [[유진오]], 해방후 초대~5대 국회의원을 연임한 5선 국회의원이자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의 온건파 정치인 [[이재학 (1904년)|이재학]]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영문과 동문으로 학사 학위 취득 후에도 그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 (이효석 단편소설)|행진곡(行進曲)]]》, 《[[기우 (이효석 단편소설)|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 (문학 단체)|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 (이효석 단편소설)|돈(豚)]]》, 《[[수탉 (이효석 단편소설)|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젊은 시절의 그는 '가난뱅이 작가<ref name="sumyonje">[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2/25/2004022555285.html 평론가 이상진, ''한국 근대작가 12인...'' 출간] {{웨이백|url=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2/25/2004022555285.html |date=20140109042710 }} 조선일보 2004.02.25</ref>'였다. 그는 돈없이 자신의 가난하고 빈한한 처지를 스스로 '가난뱅이 작가'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가난뱅이 작가였던 이효석은 경성 토호 집안이었던 처가에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백방으로 직업을 구했다. 중학 시절 은사가 주선해준 취직 자리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였다. 문인들의 작품을 사전 검열하는 곳이다.<ref name="sumyonje"/> 동료들의 지탄이 빗발쳤다. 결국 이효석은 열흘 만에 [[조선총독부]]를 그만뒀다.<ref name="sumyonje"/> 1933년에은 [[구인회 (문학 단체)|구인회]]를 결성했다.
 
=== 교수 생활과 작품 활동 ===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의 [[국문학]]과 [[영문학]] 교수가 된 후, 강의 활동과 동시에 《[[ (이효석 단편소설)|산]]》, 《[[들 (이효석 단편소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 (소설)|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1909년)|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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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작품 ==
* 《[[도시와 유령]]》 - 1928년(22세21세<ref>{{웹 인용|url=http://www.hyoseok.net/bbs/content.php?co_id=sub03_2_1|제목=작가의삶|성=이효석문학관|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이효석문학관|확인날짜=2020-06-0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91025064235/http://www.hyoseok.net/bbs/content.php?co_id=sub03_2_1|보존날짜=2019-10-25|url-status=dead}}</ref>)
* 《[[기우 (이효석 단편소설)|기우]]》 - 1929년(23세22세)
* 《[[돈 (이효석 단편소설)|돈]](豚)》
* 《행진곡(行進曲)》 -1929년(22세)
* 《[[수탉 (이효석 단편소설)|수탉]]》
* 《돈(豚)》
* 《[[장미 병들다]]》 - 1938년 (32세)
* 《수탉》
* 《[[산 (이효석 단편소설)|산]]》
* 《산》
* 《[[들 (이효석 단편소설)|들]]》
* 《들》
* 《[[메밀꽃 필 무렵]]》 - 1936년 (30세29세)
* 《[[화분장미 (소설)|화분(花粉)]]병들다 - 1939년1938년 (33세31세)
* 《[[행진곡화분 (이효석 단편소설소설)|행진곡화분(行進曲花粉)]]》- 1939년 -1929년(23세32세)
* 《[[기우 (이효석 단편소설)|기우]]》 - 1929년(23세)
 
== 관련 항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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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금관문화훈장 수훈자]]
[[분류:평창군 출신]]
[[분류:수막염으로 죽은 사람]]
[[분류:강원도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