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태그: m 모바일 웹
358번째 줄:
프로이센은 전쟁 승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폴란드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켰던 것이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거래였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못해 관여를 했지만, 프랑스는 아예 무시되었다. 비록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많은 이들이 러시아군이 프로이센 영토에서 프로이센군에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있고) 러시아 제국 군대가 프로이센군에 대해 선전한 것은 유럽 정치계의 한 변인으로써 러시아의 평판을 끌어올렸다.<ref name="Marston, Daniel page 90"/> 미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톤은 러시아 병력이 서로 ‘눈 깜짝하지 않고’ 한 차례 일제 사격을 주고받으며 프러시아군에 대항해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으며, 러시아 장군의 기량이 들쑥날쑥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전쟁에서 단 한차례도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았음을 주시했다.<ref name="ReferenceB">Stone, David ''A Military History of Russia: From Ivan the Terrible to the War in Chechnya'', 뉴욕; 프레이저, 2006 p70.</ref> 러시아군은 전장에서 프로이센군을 몇 차례 격파했지만, 러시아군은 병참 지원이 정비 부족했기 때문에 전과를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프러시아가 살아남은 이유는 전투적 우위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러시아군의 보급선이 약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ref>Stone, David ''A Military History of Russia: From Ivan the Terrible to the War in Chechnya'', 뉴욕; 프레이저, 2006 pp.70-71.</ref> 어쨌든, 러시아군이 장군의 평범한 수완에도 불구하고, 적지에서 유럽 최정예군에 승리한 것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지위를 향상시켰다.<ref name="ReferenceB"/> 전쟁의 오래된 유산 중 하나는 러시아군에 병참이라는 약점을 각성하고 러시아군의 병참 개혁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ref name="Marston, Daniel pages 90-91">Marston, Daniel ''The Seven Years' War'', 런던; 오스프리, 2001 pp90-91.</ref> 그러한 보급 체계는 러시아군이 1787년부터 1792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발칸 반도로 진격할 수 있게 했으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원수가 1798년부터 1799년까지 이탈리아와 스위스에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했으며, 1813년부터 1814년까지는 독일과 프랑스를 넘어 파리를 점령하게 했다. 이것은 7년 전쟁에서 러시아 군이 경험한 보급 문제에 직접 대응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ref name="Marston, Daniel pages 90-91"/>
 
영국 정부도 재정난에 허덕였고, 게다가 새롭게 지배하에 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프랑스를 지원한 인디언의 진압해야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1763년, [[오대호]] 지역과 북서부(현재 미국 중서부)에서 인디언이 반란을 일으켜 [[폰티악 전쟁]]이 발발했다. [[오타와 족]]을 이끄는 폰티악 추장이 프랑스 세력이 잠식되어 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영국의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연맹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영국에 의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인디언은 프랑스인과 오랜 모피 교역을 통해 친분을 다져왔었지만, 프랑스가 패전하고 미국의 식민지를 영국에 할양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계 미국인 모피 상인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영국계 상인에 모피를 판매하면서 속임수를 쓰자 분노했다.<ref name="Marston, Daniel pages 84-85">Marston, Daniel ''The French and Indian War'', 런던; 오스프리, 2002 pp84-85.</ref> 게다가 무역만이 목적이었던 프랑스와 달리, 인디언들은 영국의 통치로 백인 이주민이 유입되어 인디언들을 쫓아낼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ref name="Marston, Daniel pages 84-85"/> 폰티악 전쟁은 영국이 일시적으로나마 오대호 지역과 북서부의 지배권을 잃었을 정도로 대규모 전쟁이었다.<ref>Marston, Daniel ''The French and Indian War'', 런던; 오스프리, 2002 pp85-87.</ref> 1763년 중반 무렵에는, 영국 디트로이트 요새(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나이아가라 요새 (현 뉴욕 주 영스타운), 피트 요새(현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만 지켜졌고, 나머지 요새는 모두 인디언에 의해 점령당했다.<ref>Marston, Daniel ''The French and Indian War'', 런던; 오스프리, 2002 p86.</ref> [[부시런 전투]]에서의 승리만이 영국 오대호 지역에서 완패를 막았었다.<ref>Marston, Daniel ''The French and Indian War'', 런던; 오스프리, 2002 p87.</ref> 조지 3세의 [[1763년 선언]]은 백인 식민지 개척민이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으로 이주를 금지한 것으로, 그 목적은 인디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의 땅을 탐내고 있었던 [[13개 식민지]]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계 캐나다인과의 관계의 안정화를 목적으로 제정한 [[퀘벡 법]]도 미국 식민지 이주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ref>{{서적 인용|first=D. Peter |last=MacLeod |title=Northern Armageddon: The Battle of the Plains of Abraham |url=https://archive.org/details/northernarmageddon0000macl_j8r3 |location=밴쿠버|publisher=Douglas & McIntyre |year=2008 |isbn=9781553654124 }}</ref> 이 법은 가톨릭 신앙과 프랑스어를 보호하는 것으로, 미국 식민지 사람들을 화나게 했지만, 퀘벡 사람들은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영국 본토를 지지했다.
 
7년 전쟁은 유럽의 오래된 체제였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체제(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부르봉 왕가의 틀)의 종식을 가져왔다. 전후, [[제4대 샌드위치 백작 존 몬태규|샌드위치 경]]의 집권기에 영국은 이 체계의 재확립을 시도했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 노르웨이, 오스만 제국, 러시아 등 열강 동맹들과 싸워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후, 유럽 국가들은 영국을 프랑스보다 강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동맹참여를 거부하였다. 또한 프로이센도 1762년에 영국이 단독으로 강화를 시도한 것을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미국 독립 전쟁]]이 국제적 전쟁으로 확대된 1778년부터 1783년까지 영국은 유럽 국가들의 대동맹과 전투에 직면하였고, 영국의 주요 동맹국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ref>Lawrence Henry Gipson, "The American revolution as an aftermath of the Great War for the Empire, 1754-1763." ''Political Science Quarterly'' 65.1 (1950): 86-104. [https://www.jstor.org/stable/2144276 in JSTOR]</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