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넨베르크 전투 (141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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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 기사단장 콘라트가 죽었다. 그는 죽기 직전 그의 동생 울리히를 다음 기사단장으로 지명해선 안 된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울리히는 결국 기사단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409년 대군을 거느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요처를 공격했다. 이에 야기에우워는 바로 대응에 나서 튜튼 기사단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그 기간 동안 양군은 최대한 전력을 증강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헝가리 국왕 [[신성로마제국의지기스문트 지그문트(신성 로마 황제)|지그몬드]]에게 황금을 보냈다. 지그몬드는 곧 이 연합군을 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연합군은 보헤미아의 [[얀 지슈카]]를 끌여들였다. 1410년 7월 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프로이센으로 진군하며 엄청난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
 
그때 울리히 기사단장은 적군이 도브진(Dobrzyn) 쪽으로 접근하리라 파악하고 있었고, 리투아니아군과 폴란드군이 다른 방향에서 들어올 것이라고 대비해 군대를 분리시켜둔 상태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목표는 기사단령의 수도인 [[말보르크|마리엔부르크]]였던 것이다. 기사단은 황급히 최종 방어선인 [[드레빈츠 강]] 유역 방어선을 강화했다. 연합군은 드레벤츠 강을 지나기 위해 좀 더 동쪽으로 우회했고, 기사단은 연합군과 평행하게 강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다 강이 급격히 북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서 기사단은 강을 건너 방어적인 대형을 취했다. 튜턴 기사단은 그룬발트 마을 근처에, 연합군은 탄넨베르크 마을에 진을 쳤다. 기사단은 습지로 둘러싸인 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연합군은 5마일을 이동했고, 숲에 병력을 매복시킬 수 있는 지점을 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