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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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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