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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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2월 11일]]([[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시|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四松坪)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