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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읍, 중동면 석항리 일대는 내생군에 속해 있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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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건국 이후에 주로 대륙쪽으로의 영토확장에 주력했기 때문에 한동안 한반도 지역으로는
손이 닿지 않았고 결국 그 기간동안 두 나라는 [[말갈족]]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수가 없었다.두 나라가 국경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발해의 등주 공격]]을 기화로 말갈족을 토벌해가며 함흥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730년]] 경에 발해가 [[북청]]에 남경남해부를 설치해 간신히 한반도의 북쪽 일각을 차지하면서부터였다.<ref>조이옥(2001)통일신라의 북방진출 연구</ref> 두 나라가 국경을 맞닿게 됨에 따라 두나라는 교류의 필요로 교통망의 정비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따라 발해에서는 8세기 전반에 동경용원부에서 남경남해부를 거쳐 [[천정군]]에 이르는 [[신라도]](新羅道)를 개설했다.
한편, 신라쪽에서는 [[소지마립간]]때 전국의 교통망을 정비하며 동해안에도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신라시대에 이르면 [[동해통]]이라는 국제도로망으로 재 정비되었다.
경주의 간문역(艮門驛)에서 출발한 북해통은 안강을 거쳐 [[흥해]]에 이른 다음 동해안을 따라
천정군에서 신라도와 접속이 이루어졌다. 북해통과 신라도를 주요 교통로로 신라와 발해는 사신 왕래등의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764년]]에는 당나라 사신 한조채(韓朝彩)가 두 도로를 이용해 발해에서 직접 신라로 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