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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가 황제를 칭하자 잠시 은거하였으나, 위안 정부가 호국군에게 타도되자 다시 복귀하였다. 위안이 죽은 다음 돤은 이른바 [[북양정권]]을 세웠다. 돤의 일파를 소위 "환계(皖系)" 군벌이라고 한다.
 
[[1917년]] 국무총리 재직시,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둘러싸고 총통이었던 [[리위안훙]]과 소위 "부원지쟁(府院之争)"이라고 일컫는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때 세력공백을 이용하여 복고파 군벌인 [[장쉰]]이 청조의 [[선통제]]를 복위하는 소동을 벌였으나, 20일 후에 돤에게 진압되었다. 돤치루이 정권이 국회와 임시 약법을 폐기하려고 하자, [[쑨원]]은 이에 반대하며 호법운동을 펼칠 것을 주장했다.(1917년 7월)<ref> 위안싱페이 저, 장연 역, 《중국문명대시야 4/완결 (中华文明大视野)》김영사(2007) 504쪽 {{ISBN|978-89-349-2739-6}}</ref>
 
[[펑궈장]]이 총통에 재직하고 있을 때, 국민당이 지배하고 있던 중국의 남북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문제를 둘러싸고 돤과 펑은 대립하여 다시 제2차 "부원지쟁"이 일어났다. 1918년 펑의 임기가 만료되자, 중화민국의 제2대 국회는 [[쉬스창]]을 총통으로 선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