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공의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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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 몇몇 [[교황 칙서]]
}}
[[로마 가톨릭교회]]의 17번째 [[세계 공의회]]는 1431년 2월 갑작스럽게 사망한 [[교황 마르티노 5세]]가 보헤미아의 [[후스 전쟁]]의 전후 사정과사정 및 [[오스만 제국의 성장]] 등으로 1431년인한 2월문제를 갑작스럽게 사망한다루기 [[교황 마르티노 5세]]가위해 '''[[바젤]] 공의회'''로서 소집했다소집되었다. 가장 중점 사항은 [[공의회수위설]]과 [[교황 수위권]] 사이의 분쟁이였다분쟁이었다.
 
1437년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제국)|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 사후에 두 번째 주제가 진행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이전의 공의회에 맞서대항하여 1438년 1월 8일에 '''[[페라라]] 공의회'''를 소집했고 이탈리아에 [[비잔티움 제국]] 대사들을 불러들이는데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바젤 공의회는 처음에는 그를 [[이단]]이라 선포하며 그의 지위를 정지키시고, 그후 1439년 11월에 [[대립교황]] [[아메데오 8세 디 사보이아|펠릭스 5세]]를 선출시켰다. 이들에 반대하던 '''피렌체 공의회''' (페라라에서 일어난 [[선페스트]]를 피하기 위해 옮김)가 여러 [[동방 교회]]들과의들과 교회 통합 협상을 한후이루어내며 막을 내렸다. 이 공의회는 [[동서 교회의 분열]]을 종결하는 잠시 다리가교 역할을 했으나, 교황권을 위한 정치 쿠데타였다. 1447년 지기스문트의 후계자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는 [[바젤]]에서 바젤 공의회를 축출시키라 명령을 내렸고; 이렇게 쫒겨난 공의회는 1449년에 스스로 해산할때까지해산할 때까지 [[로잔]]에서 다시 모였다.
 
{{세계 공의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