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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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했다. 원나라에서 올린 그의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다. 동행했던 송송례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ref>《동안거사집》 권4, 빈왕록 서문</ref>
 
귀국 후 벼슬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다. 하지만 탐관오리 7명의 죄상을 밝혀 가산을 몰수한 일로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었으며, 이 시기에 동안거사(動安居士)라고 스스로 호를 지었다.<ref name=a>《고려사》 권106, 〈열전〉19, 이승휴 </ref>
 
[[1280년]](충렬왕 6년)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된 이승휴는 감찰시사(監察侍史) 심양(沈諹)<ref>《고려사》 권106, 〈열전〉19, 심양 참조.</ref>, 잡단(雜端) 진척(陳倜), 시사(侍史) 문응(文應) 등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되었다.<ref>《고려사》 권29, 〈세가〉29 , 충렬왕 6년(1280) 3월 14일(을묘); 《고려사》 권106, 〈열전〉19, 심양</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