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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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의 [[고구려]]침공은 저번 [[사마의]]와 [[관구검]]의 요동 [[공손연]] 정벌 때와 달랐다. 당시 요동 정벌 때는 [[요하]]라는 천혜의 장애물이 있어 방어에 용이했지만 일단 도하하면 요동의 도읍 [[양평]]<ref>나중의 고구려의 요동성</ref>까지는 쭉 평지였으며 반대편에는 고구려가 있어서 완벽한 포위가 가능했지만, 고구려는 당시 중화관으로는 세상의 끝이라는 요동보다 더 동측에 있었고 고구려 도읍 [[환도성]]을 포함한 대부분은 평지가 아닌 험준한 산세 속에 있어서 주로 평지에서 기동전과 공성전에 익숙했던 [[위 (삼국)|위]](魏)군에게는 요동 공손연 정벌 때와 판이(判異)한 환경에서 원정했다.
 
관구검의 [[위 (삼국)|위]](魏)군이 재공격하자 동천왕은 고구려 철기 5천 기를 거느리고 또다시 선봉에서 돌격했지만,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유인해 금번에는 고구려군이 포위됐다. 관구검의 [[위 (삼국)|위]](魏)군이 고구려군을 포위해 결사로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2만 명 중 1만 8천여 명이 죽은 탓에 주력군은 소멸했고 동천왕은 기병 1천여 기를 대동하고 가까스로 탈출해 [[압록강]] 부근으로 도주했지만, 비류수 전투와 양맥 전투에서 대패한 관구검 휘하 위군도 전력을 크게 상실했으므로 일단 철수한다.
 
== 245년 2차 고구려-위 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