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섬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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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섬유를 일컫는 다른 표현으로 견사(絹絲), 잠사(蠶絲), 주(紬)가 있으며, 고대에는 "실"을 뜻하는 絲 자체가 견섬유만을 의미했다. 견직물은 명주(明紬)라고도 하며, '''비단'''(緋緞)은 견직물 가운데 특유의 광택을 띠는 천을 가리킨다. 비단의 광택은 빛을 [[산란]]하여 [[프리즘]]과 같이 형형색색의 반사광을 만들기 때문에 생겨난다.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은 한국어 고유어로 깁, 사라(紗羅)로도 불린다.
 
여러 종류의 [[유충]]이 [[번데기]]가 되면서 단백질 섬유를 만들기는 하지만 [[누에]]처럼 양이 많지는 않다. 누에가 만드는 [[고치]]는 번데기 전체를 명주실로 감싸기 때문에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를 섬유로 이용하였다. 비단은 한국, [[중국]], [[남아시아]], [[유럽]]과 같은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이용되어 왔다.
 
==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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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andscape of quick water from high mountain by Zhao Zuo.jpg|섬네일|100px|비단에 그려진 1611년 명나라 화가 조주의 산수도]]
 
최초의 견직물은 [[기원전 6000년]] 무렵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 사이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황제 (전설)|황제]]의 아내 누조(嫘祖)가 처음 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ref>[http://blog.daum.net/yjo722/13445554 중국천진 문동이유학기<!-- 봇이 붙인 제목 -->]</ref> 비단은 원래 중국의 왕과 귀족만이 사용하였으나 [[중국 문화]]의 전파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으며, 기원전 200년경 최초로 한국에, 이후 호탄과 일본, 인도 등에서도 양잠이 행해졌다. 비단은 [[아시아]]의 대부분 지방에서 가장 귀한 옷감으로 취급되었으며, 아주 오래전부터 아시아 국가들의중국의 중요한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비단은 도자기, 향료 등과 함께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무역]]에서 가장 무역량이 큰 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고고학자]]들에 의해 [[장시성]]에서 약 2,500년 전의 비단 옷감과 베틀, 염료 등이 발굴되어, [[주나라|동주]] 시대부터 비단이 대량으로 생산되었음이 알려졌다.<ref>[http://english.people.com.cn/90001/90782/6228297.html People's Daily Online - Chinese archaeologists make ground-breaking textile discovery in 2,500-year-old tomb<!-- 봇이 붙인 제목 -->]</ref> 한편 [[한나라]]([[기원전 202년]]~[[220년]]) 시대의 유적인 [[마왕퇴]]에서 비단의 생산을 위한 전문 기술인 집단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한국은 비단 종주국 중의 하나로 한국인의 조상은 매우 오래전부터 독자적으로 비단을 생산해왔다. 고조선의 뽕나무는 중국과 다른 품종이고 비단의 직조 방법과 염색 기술도 다르다. 고조선은 독자적인 비단 생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조선의 양잠 기술이 독자적인 개발과 발전을 이룬 것은,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평안도 평양에서 출토된 기원전 3300년경의 질그릇에서 확인된다. 이 질그릇의 밑바닥에 통 잎 뽕나무의 뽕잎 무늬가 새겨져 있다. 통 잎 뽕나무를 재배하였다는 것은 이 뽕잎을 먹는 토종 뽕 누에를 키워 누에고치 실을 뽑았음을 의미한다. 한국 토종 뽕 누에는 중국과는 다른 품종으로 야생 메 누에를 순화시킨 것이다. 즉, 한국의 비단은 야생 누에로부터 뽑은 비단이었다. 따라서 고조선이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독자적인 양잠 기술을 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2020년 7월 북한 고고학자들은 야생 누에로 만든 비단을 락랑구역 일대에서 발견한 것을 발표했다.
 
자주시보 이정섭 기자는 "문헌자료와 고고학자료에 있는 것처럼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누에치기를 하였는데 그 품종도 다른 나라의 것과 구별되는 석잠 누에였다. 자라는 기간이 짧고 생활력이 강한 석잠 누에에서 뽑은 실로 가볍고 부드러운 비단천을 짰는데 그 비단은 겸포로서 다른 나라의 비단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옛 문헌에 씌여진 잠상을 알며 겸포를 만든다는 구절에서 조선 사람들이 매우 오래전부터 우리 고유의 비단을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어아주(물고기의 이빨과 같이 하얗고 아침 노을과 같이 아름다운 은은한 색을 내는 비단)와 같은 비단은 널리 수출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압록강 대안 요령성 동구현 마가점진 후와유적에서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4000년까지 올라가는 누에 소조를 발견하였다. 이 누에는 중국의 넉잠누에와 다른 석잠누에였다. 북한은 자주시보를 통해 “가볍고 질기며 아름다운 무늬와 부드러운 손맛을 가진 비단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직물이다”라며 “우리나라에서는 원시시대 말기와 고대시기에 베, 모시와 함께 비단을 생산하였다”라고 설명했다.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을 비롯한 신석기 시대 및 청동기시대 유적들에서 누에를 형상한 질그릇들이 발굴된 사실도 근거로 들었다. 매체는 “삼국시기 비단 짜는 기술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라며 “일본의 역사책 ‘일본서기’에는 4~5세기부터 7세기에 우리나라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비단 짜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는 기록이 있다”라고 언급했다.
 
고대 복식사를 연구하는 한국의 박선희 교수는 고조선의 앞선 청동기 문화는 농기구, 제기, 무기 등의 제작 기술 수준도 높였지만, 방직기와 같은 직물 생산도구의 발전도 가져왔다고 말했다. 직물 생산 도구의 향상은 사직물(비단), 면, 마 등의 생산을 보편화시켰을 뿐 아니라, 생산 기술도 급성장시켰다. 배달국의 배달 시대에 비단이 생산되었다는 고고학 자료는 초대 단군왕검이 하얼빈에 사는 하백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여 그에게 누에치기를 관장하게 하였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당시 석잠누에 한국 실크는 매미 날개처럼 아주 얇고 가벼우며 부드러운 비단으로 고구려의 벽화에 나오는 것처럼 바람에 아름답게 날리는 실크이며 우리가 앞서서 생산했고, 실크의 종류도 더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의 비단이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발전한 기술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상명대 교수이자 한복 복식 연구가인 박선희 교수는 브레이크뉴스와 자신의 저서를 통해 "고조선 시대부터 줄곧 많은 생산량을 가지며 복식재료로 즐겨 쓰여 졌던 실크의 경우 색상과 문양이 화려한 상태로 출토된다. 평양 낙랑구역 무덤들에서는 해방 이전과 이후 고조선과 최씨 낙랑국이 생산한 많은 양의 다양한 종류의 사직물이 출토되었다. 이 천들은 모두 염색한 것이었고, 바탕색과 다른 색으로 문양을 직조하여 넣은 것도 있으며, 일부러 색상을 내기위해 탈색 한 것도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이처럼 염색과 탈색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본다면 부여에서 겉옷을 만들었던 천들은 염색을 통해 문양이 두드러지지 않게 단아한 색감을 냈을 것이다. 실크는 정련공정에서 약간의 세리신을 남겨두는 것이 탄성을 부여하는데 더 좋으며, 세리신이 섬유표면에 0.5퍼센트 남아있는 경우에 완전히 정련된 경우에 비하여 염색이 최고 1.6배나 진하게 된다. 특기할 것은 평양 낙랑구역에서 출토된 천들이 성분분석 결과 이 같은 과학적인 염색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점이다. 평양 낙랑유적에서 출토된 고조선의 실크들은 모두 염색을 거친 직물로서 주로 밤색과 자주색을 띠며 문양이 없는 것과 문양이 있는 것, 또는 넝쿨문양을 수놓은 것, 붓으로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 다양한 기법을 표현한 염색직물이다.
 
신석기시대부터 발달된 천연염료의 생산과 발달은 고조선시대에 오면 복식에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의복에 문양을 그려 넣거나 실이나 천을 염색하여 문양을 직조하여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더하는 등 고유한 기법으로 화려한 복식문화의 갖춤새를 정형화시킨다.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 복식에도 고분벽화 등에는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이 있는 의복이 대부분이다. 특히 고구려는 금(錦)으로 상징될 만큼 금(錦)을 즐겨 입었다.
 
금(錦)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이고 이를 섞어 화려한 문양으로 짠 것이다. 고조선 후기 유적인 길림성 후석산 유적에서는 방직기로 짠 마포가 출토되었다. 방직기 사용은 고조선의 상당히 높은 직조 수준을 보여준다.
 
이 유적에서 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 단추를 비롯한 여러 치장용품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단추도 달고 다양하게 치장하였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고대 한국은 고조선 이전 배달 시대 때부터 비단으로 옷감을 생산할 수 있었고, 수준 높은 금속 가공 기술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직물 생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
 
그 외 세계에서는 [[기원전 6000년]] 무렵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 사이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첫 황제가 즉위할 때 축하를 위해 비단을 가져와 선물한 이들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에서 시작한다. 비단은 원래 중국의 왕과 귀족만이 사용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일반에 퍼졌고 기원전 200년경에는 호탄과 일본, 인도 등에서도 양잠이 행해졌다.
 
비단은 [[아시아]]의 대부분 지방에서 가장 귀한 옷감으로 취급되었으며, 아주 오래전부터 아시아 국가들의 중요한 수출품으로 자리잡았다. 비단은 도자기, 향료 등과 함께 [[산업혁명]] 이전 시대의 [[무역]]에서 가장 무역량이 큰 상품 가운데 하나였다. 2007년 중국의 [[고고학|고고학자]]들에 의해 [[장시성]]에서 약 2,500년 전의 비단 옷감과 베틀, 염료 등이 발굴되어, [[주나라|동주]] 시대부터 비단이 대량으로 생산되었음이 알려졌다.<ref>[http://english.people.com.cn/90001/90782/6228297.html People's Daily Online - Chinese archaeologists make ground-breaking textile discovery in 2,500-year-old tomb<!-- 봇이 붙인 제목 -->]</ref> 한편 [[한나라]]([[기원전 202년]]~[[220년]]) 시대의 유적인 [[마왕퇴]]에서 비단의 생산을 위한 전문 기술인 집단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고대 비단 무역의 증거로는 [[기원전 1070년]] 비단을 이용한 [[고대 이집트]] 제21왕조의 [[미라]]가 있다.<ref>[http://www.silk-road.com/artl/egyptsilk.shtml Use of Silk In Ancient Egypt<!-- 봇이 붙인 제목 -->]</ref> 이러한 비단 무역은 결국 [[한국|한국과]] [[일본]], [[중국]]과 [[인도]], [[중동]]과 [[북아프리카]], [[유럽]]을 잇는 무역로로 발전하였다. 이 무역로가 바로 [[비단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