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주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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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이 왜 극우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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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보
| 국가 = 대한민국
| 배경색=
| 이름= 한국민주당
| 원어 이름=한국민주당 韓國民主黨
| 원어 이름=韓國民主黨
| 로고=
| 크기=
| 약칭= 한민당
| 총재=
| 당수=
| 당원= 약 90만 명(1947년)
| 의장=
| 대표=
16번째 줄:
| 창준위원장=
| 창주위원장=
| 초대대표초대 수석총무=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 마지막 총재수석총무=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 창당=[[1945년]] [[9월 16일]](설립)<br />[[1949년]] [[1월 26일]](해체)
| 마지막 대표=
| 마지막 당수=
| 마지막 의장=
| 창당=[[1945년]] [[9월 16일]](설립)<br />[[1949년]] [[2월]](해체)
| 중앙 당사=
| 선행조직=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
| 후계정당=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 이념= [[자유주의]]<br/>[[고전적 자유주의]]<br/>[[보수주의]]<br/>[[반공주의]]
| 스펙트럼= [[우익]] ~ [[극우]]
| 교섭단체=
| 국제=
}}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1945년]] [[9월 16일]] 결성된 극우정당으로, 사회운동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제외하면 [[한국독립당]]과 함께 [[한국의 군정기|미군정기]]의 양대 우익정당이었으며, 대내외적으로 호남지역주의 [[친일파]] 정당으로 인식되었다.<ref name=":16" /><ref name=":17" /><ref name=":1" /><ref name=":3" />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Korea Democratic Party, 영문약칭 KDP)은 미군정기 정치 정당중 하나이다. [[1945년]] [[9월 16일]]에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 등 합당하여 조직된 정당이었다. [[고하 송진우|송진우]],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초대 당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였으나 [[1945년]] [[12월 30일]]에 암살되고 다음 당수 [[장덕수]] 역시 [[1947년]] [[12월 2일]]에 암살당했다.
 
한국민주당에 참가한 정당단체는 [[8월 18일]] [[원세훈 (1887년)|원세훈]]이 창당한 [[고려민주당]], [[8월 28일]] [[김병로]], [[백관수]] 등이 창당한 [[조선민족당]], [[9월 2일]] [[장덕수]], [[백남훈]], [[윤보선]] 등이 창당한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 [[9월 7일]] [[송진우 (1890년)|송진우]],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등이 조직한 [[국민대회준비회]] 등이었다.<ref name=":0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40_0020|제목=國史館論叢 第58輯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Ⅲ.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9월 6일]] [[조선민족당]]·[[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은 한국민주당이라는 명칭으로 통합할 것을 선언하였고,<ref name=":1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6_0030|제목=한국민주당발기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 name=":12" /> 여기에 [[국민대회준비회]]가 가세해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ref name=":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16_0160|제목=한국민주당 결당식|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초대 수석총무(당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였으나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에게 암살되었고, 그 이후의 실권자였던 정치부장 [[장덕수]] 역시 [[1947년]] [[12월 2일]] 박광옥 등에게 암살되었다. 제2대 수석총무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였다.
한국민주당에 참가한 정당으로는 [[8월 28일]] [[김병로]], [[백관수]] 등이 발기한 [[조선민족당]], [[9월 2일]] [[백남훈]], [[장덕수]], [[윤보선]] 등이 조직한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 등이었다. 이들은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합당에 합의하였고, [[9월 8일]] [[윤보선]]의 집인 [[안동장]]에서 정식 창당하였다. [[1945년]] [[12월]]의 [[신탁통치]] 때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1946년]] [[2월]]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에는 참석,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삼상회의]] 당시에는 신탁통치에 반대하였으나,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부터는 찬탁에 서명한 뒤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현장에서 반탁을 외치자고 종용하였다. [[1946년]] [[10월]] [[좌우합작위원회]]의 '좌우합작 7원칙'을 비난하다가 당내 독립운동가들이 대량 탈당하는 사태를 겪은 뒤 호남지역주의 친일파 정당으로 전락했지만 당의 결속력은 더 강해졌다. [[1948년]] [[1월]]에 [[이승만]]의 단정단선론과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이 나뉘었 때는 단정단선론을 지지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다([[한국독립당]]은 단정단선론에 반대하여 총선에 불참하였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한 목소리를 내는 정당이 아닌 범우익 사회단체였다). [[1948년]]~[[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할 당시 정재계에 전방위적으로 로비를 하는 등 비협조적이었다.<ref name=":1" /><ref name=":3" /><ref name=":21" /> [[1948년]] [[7월]]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 구성 때 [[이승만]]이 한민당계 중에서 [[김도연 (정치인)|김도연]] 한 명만 입각시키자 반이승만 세력화를 시작, [[1949년]] [[6월 21일]] [[이승만]]이 전라도 친일지주층을 저격하여 [[조봉암]]을 입각시키고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자 반이승만 세력으로 완전히 굳어졌다.
[[1948년]] [[1월]]에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과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이 나뉠 때는 [[이승만]]의 단정 수립론을 지지, 선거가 가능한 지역 만이라도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정부 수립을 준비할 것을 주장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내각 구성 때 [[김도연]] 등 일부 인사만이 반영되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다가 결국 야당화되었다. [[1949년]] [[2월]]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의 일부와 합당하여 [[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2월 10일]] 친일파 정당 이미지를 타파하고자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의 일부와 합당하여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으로 개편하였으나,<ref name=":20" /><ref name=":2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0_1949_02_10_0280|제목=韓國民主黨과 大韓國民黨이 통합한 民主國民黨 결성대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친일파에 관대한 독립운동가들과의 합당이었기 때문에 친일파 이미지 쇄신에는 실패하였다. [[1951년]] [[이승만]]의 [[자유당 (대한민국)|자유당]] 창당을 계기로 완전히 야당화 되었고, 이렇게 형성된 임정계와 한민당계의 양당대립구도는 2020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민당계 인사는 2000년대 [[DJP연합]]이 파탄나고 진보주의 성향이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계가 당권을 장악한 이후부터는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정당]] 내에서 상당히 멸시받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421&aid=0004919117|제목='동교동계' 복당설에…"잊힌대로 사는 법도 배우셔야"(종합)|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뉴스1|확인날짜=}}</ref>
== 개요 ==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한민당은 1945년 [[9월 16일]]에 결성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존속하다가 1949년 2월 10일 발전적으로 해체, 민주국민당으로 개편되었고, 민국당은 그 이후부터 원내 야당으로 활동하다가 역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ref>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 337페이지</ref>
 
=== 광복역사 직후 ===
=== 우익정당 통합 결의 (1945) ===
광복 직후 보수적인 인사들과 지주, [[미국]]과 [[유럽]] 유학생 출신들은 각자 정당을 조직했다. [[1945년]] [[8월 18일]] [[원세훈 (1887년)|원세훈]], [[이순탁]], [[조병옥]]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는데 해방 직후 [[한국]]에서 조직된 초기 정당 중의 하나이다. 그 뒤 [[8월 28일]] [[김병로]], [[백관수]] 등은 [[서울]]에서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을 조직했고, [[9월 2일]] [[백남훈]], [[장덕수]], [[윤보선]], [[장택상]], [[허정]] 등이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참고|분류:한국민주당 당원}}[[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세력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좌파세력들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극좌세력들이었다. 대부분 [[친일파]]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민주당의 기독교 계열이나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은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ref name=":0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40_0020|제목=國史館論叢 第58輯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Ⅲ.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비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해방 이후 정치노선과 활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일제 강점기]] 말기에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총독부]]에 협력하지도 않았던 세력들은 [[일본 제국|일제]]의 [[황민화 정책|황국신민화 정책]]에 협력했던 인사들에 비해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이 중 [[원세훈 (1887년)|원세훈]]이 가장 먼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원세훈 (1887년)|원세훈]]은 해방 다음 날 은거하고 있었던 평택에서 상경하여 이학수(韓學洙)의 집에 기거하면서 [[1945년]] [[8월 18일]] [[고려민주당]]을 창당하였다.<ref name=":02" /><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h_052_0030_0020_0010_0010|제목=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한국민주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들은 하나의 단결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 [[8월]]말부터 협상에 들어갔으며 [[9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윤보선]]의 자택인 [[안동장]]에서 통합에 합의한다.
 
[[1945년]] [[8월 28일]] [[김병로]]·[[백관수]]·[[조병옥]]·[[함상훈]]·[[김약수]]·[[이인]] 등은 서울 계동에서 [[조선민족당]]을 창당했다. 이때 [[원세훈 (1887년)|원세훈]]의 [[고려민주당]]이 흡수 통합되었다.<ref name=":1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27_0020_0020_0010|제목=國史館論叢 第27輯 > 自由黨의 政黨政治(孫鳳淑) > Ⅱ. 건국초기의 정당난립과 자유당의 창당 > 1. 제1공화국의 수립과 이승만정권의 성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034|제목=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
[[1945년]] [[9월 4일]] [[우익]]진영의 대표자 82명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처음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등의 명망가를 영입하려 하였으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우익 여당이 있을텐데 별도의 당을 창당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라는 권고에 못이겨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9월 2일]] [[장덕수]]·[[허정]]·[[백남훈]]·[[윤치영]]·[[윤보선]] 등은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ref name=":15" />
=== 창당 배경 ===
[[파일:송진우.gif|섬네일|왼쪽|130px|초대 수석총무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한민당 창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9월 7일]]에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서상일]] 등 [[동아일보사]] 계열의 인사들은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을 계획하였다. 또한 같은 [[9월 7일]] [[이인]], [[조병옥]] 등이 결성한 [[중경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곧 [[9월 8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준비를 계획하는 한편 한민당의 측면지원조직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9월 4일]] [[조병옥]],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등 유지는 종로 청년회관에서 [[임시정부 및 연합군환영준비회]](臨時政府 及 聯合軍歡迎準備會)를 조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4_0030|제목=임정 및 연합군환영준비회 조직|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9월 8일]] 한민당은 창당 발기인 명의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 성명서를 [[동아일보]]와 중앙방송국 등에 발표했는데, 그것은 '기미(己未) 이래의 조선 독립운동의 결정체이며 국제적으로 승인된 재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반대, 부인하는 도배(徒輩)가 있다면 이는 3천만 민중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창당 이전부터 [[조선공산당]]과의 투쟁에 있어서 선봉적 역할을 한 세력의 모임이었던 한민당은 이후로도 [[한국독립당]], [[독립촉성회]]와 연대하여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 등 좌파에 대한 투쟁을 지향하였다.
 
[[1945년]] [[9월 6일]] [[대한민주당]](大韓民主黨, [[조선민족당]]의 이명으로 보인다)과 [[한국국민당 (1945년)|한국국민당]]이 한국민주당이라는 명칭으로 합당하기로 선언하였고, 강령, 정책을 발표하였다.<ref name=":11" /><ref name=":1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6_0020|제목=한국민주당 발기선언 및 강령, 정책|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입성하여 군정을 선포하였고, 10일 한민당계열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를 접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9월 11일]] 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G-2)는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듣게되는데, 이들 한민당 세력들은 '[[건준]]을 비롯한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ref>G-2 Periodic 1945. 9. 12 보고서</ref>
 
식민지시기 친일을 하지 않았던 국내의 우익인사들이 [[광복절|8·15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한민당]]에 모두 참여하게 된 데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념적 동질성과 함께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좌익세력들에 의해 독선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nh_052_0030_0020_0010_0010|제목=신편 한국사 52 대한민국의 성립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2. 주요 정치세력의 통일국가 수립운동 >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 (1) 한국민주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창당 멤버의 한사람인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라고 하였다.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활동과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쳐 있었고, 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ref name="ReferenceA">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2페이지</ref> 이들의 조직을 타도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당면과제였다는 것이다.
 
=== 한국민주당 창당 조직과 당 행동강령(1945) ===
한편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과 동시에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과 중도우파 성향의 [[안재홍]]이 협력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8_16_0050|제목=건준위원장 呂運亨,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8_16_0020|제목=건준 준비위원으로서 안재홍이 한일간 自主互讓 할 것을 방송|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그러나 건준의 본질적인 중도적 정치노선 성향은 [[박헌영]]의 [[공산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 주도해 나아감에 따라 변질되어갔고, 그 상태로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이 선포됐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6_0010|제목=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민주당은 [[1945년]] [[9월 8일]] [[윤보선]]의 집인 [[안동장]]에서 정식 창당하였다. 이들 한민당에 입당한 구성원들은 미국, 일본 등 해외 유학파와 그밖에 4분의 2가량이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핵심<ref>[[김약수]]나 [[유진희]]등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일부 진보적 정치인사들이 한민당에 입당했는데, 이들은 주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노선에 반발하여 한민당에 입당한 경우다. 이들은 한민당의 정치노선에 반발하여 이듬해 1946년 탈당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거나 [[김규식]]계열 정치노선과 같이하게 된다. 한민당 핵심인사들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김성수 (언론인)|김성수]],[[윤치영]],[[조병옥]],[[장덕수]],[[유억겸]]등이었다.</ref> 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자 [[1945년]] [[9월 7일]] [[송진우 (1890년)|송진우]]·[[김성수 (언론인)|김성수]]·[[서상일]]·[[김준연]]·[[장택상]]·[[설의식]] 등 [[동아일보]] 계열 및 우익 인사들은 건준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국민대회준비회]](국준)를 조직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7_0030|제목=우익진영, 임시정부 지지를 표명하며 국민대회준비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7_0010|제목=국민대회준비회 취지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창당 멤버의 한사람인 [[조병옥]]에 의하면 한민당의 주 목적은 [[건준]] 타도라고 하였다. 한국민주당은 건국준비위원회를 타도하는 활동과 그 다음 소위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등의 좌익 집단을 성토, 타도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인민위원회의 조직은 지방 방방곡곡으로 뻗쳐 있었고, 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는 것도 결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조직을 타도하는 것이 한민당의 첫 당면과제였다는 것이다.<ref name="ReferenceA">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42페이지</ref>
친일파를 직접 대표자로 선출하지는 않았지만 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매우 약했다.<ref>1945년 10월, 우파 단체이자 잡지사인 <선구>회라는 단체에서 해방정국 주요정치인들 여론조사를 실시한적이 있었는데, 1위가 [[여운형]], 2위가 [[이승만]], 3위가 [[김구]], 4위가 [[박헌영]], 5위가 [[이관술]] 순이었다. 한민당계열 인사들은 단 한명도 뽑히지 않았었다.</ref>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1600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하면서 당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많이받았던 [[건준]]을 맹렬히 비난, 공격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80~83쪽</ref> 창당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1945년]]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의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어떤 종류를 불문하고 단호히 배격함"을 선언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비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8_0060|제목=한민당,임정외에 정권 참칭하는 단체 및 행동 배격 결의 성명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하지만 12월 중순 [[신익희]], [[장덕수]], [[송진우 (1890년)|송진우]]의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이 당시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권위가 필요했을 뿐 진정성 있게 임정봉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인용문|(중략)
[[일본 제국]]주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쁜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해외의 들입고 감추인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br /><br />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중경에서 고전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대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br /><br />
우리는 맹서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루(전쟁보루)를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br /><br />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민의 자반석 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br /><br /><br />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br />
<br />
강령
*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1945년]] [[9월 9일]] 미 24군단이 한반도 38도 이남에 입성하여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을 선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09_0050|제목=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1·2·3호공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br />
<br />
정책
*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 중공주의<ref>중상주의</ref>의 경제정책 수립
*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 국방군의 창설
(하략)
}}
 
[[1945년]] [[9월 10일]] 한민당계 인사인 [[오긍선]]이 미군 장교를 접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한민당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9월 11일]] 군정사령관과 미정보참모부(G-2)는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윤치영]] 등을 만나 한반도 상황을 듣게되는데, 이들 한민당 세력들은 '[[건준]]을 비롯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ref>G-2 Periodic 1945. 9. 12 보고서</ref>[[파일:송진우.gif|섬네일|왼쪽|130px|한국민주당 초대 수석총무 [[송진우 (1890년)|고하 송진우]]]][[1945년]] [[9월 16일]] [[천도교]] 강당에서 당원 16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민주당이 정식 출범하였다.<ref name=":0" />
경제 강령을 만들 당시 [[허정]]은 무상몰수를 하든 유상매수를 하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허정은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 국유화는 곧 농민들을 소작농화 하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따라서 한민당은 농지에 대해 일부 무상몰수를 포함한 유상매수와 유상매매 또는 분배를 당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이어 한민당은 임정친일파를 간부와직접 항일대표자로 독립운동가들을선출하지는 영수로않았지만 추대하였다지주와 함께 친일파 세력을 상당수 포섭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민중들로부터 지지기반이 매우 약했다. 한민당은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1868년)|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이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거절하였다. 한편 [[조병옥]]은 '[[김규식]] 박사도 당의 영수로 추대할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다른 한민당 당원들에 의해 번번히 묵살당했다. [[조병옥]]은 '나는 그([[김규식]])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기대를 가졌다'며 많이 아쉬워하였다.<ref>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48페이지</ref> 며 많이 아쉬워하였다.
 
[[1945년]] [[9월 21일]] 한민당 중앙부서가 확정되었는데, 당수제 또는 최고위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총무제를 채택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1887년)|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 경기의 [[김도연 (1894년)|김도연]],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1884년)|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09_21_0070|제목=한민당 총무위원 9명 선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수석총무 [[송진우 (1890년)|송진우]], 중앙감찰위원장 [[김병로]], 당무부장 [[이인]], 외무부장 [[장덕수]]가 임명되었다.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은 정강과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공주의<ref>중상주의</ref>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조항은 사회주의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허정]]은 한민당은 총무 중심의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였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ghojong05">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5페이지</ref> [[조병옥]]은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인 8총무제를 채택하고 수석총무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피선하고 총무에는 [[김병로]], [[이인]] 등과 나도 그 8총무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고 하였다.<ref name="ReferenceA" />
== 당원 수 ==
창당 19일 후인 [[1945년]] [[9월 27일]]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국민주당의 당원수는 전국적으로 5만 명이었다. 이후 서울의 당 본부와 [[경기도]]지구당을 조직하고 [[1945년]] [[12월 5일]] [[부산시]]지구당, [[경상남도]]지구당을 결성한 뒤로는 지방 지구당 조직을 확대, 확장시켰으며, 지역의 유지, 해외 유학파,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자, 온건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이 참여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초기 한민당은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에 협력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즉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의하여 한국이 곧 독립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군정에 굳이 협력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로 의견이 분분했다. 한데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한국은 군정 단계의 훈정기(訓政期)를 거치지 않고서는 치안유지를 할 수가 없고, 또 한반도의 적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한국민주당 수뇌부에서는 [[와신상담]]의 격으로 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을 하였다고 한다.<ref name="ReferenceA" /> 이후 한민당은 미군정의 사실상의 여당의 기능을 하였다.
[[1946년]]말 당시 한국민주당은 남한 전역에 54개의 지구당을 조직하였고, 당원수도 [[1946년]] [[12월]] 기준 23만여 명이었다. [[1947년]] [[12월]]말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민당의 당원수는 86만 6천여 명이었다.
 
[[1945년]] [[9월 27일]] [[미군정]]청 내무부에 신고된 한국민주당의 당원수는 전국적으로 50,000명이었다. 이후 서울의 당 본부와 경기도지구당을 조직하고 [[1945년]] [[12월 5일]] 부산시지구당, 경상남도지구당을 결성한 뒤로는 지방 지구당 조직을 확대, 확장시켰으며, 지역의 유지, 해외 유학파, 지주, 타협적 민족주의자, 온건 민족주의자, [[친일파]] 등이 참여하였다.
== 역대 정당 당원 ==
=== 임정봉대론 (1945) ===
{{참고|분류:한국민주당 당원}}
[[1945년]] [[10월 20일]] [[고하 송진우|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수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0_20_0080|제목=한국志士영접위원회 결성|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5년]] [[10월 23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0_23_0100|제목=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집단지도체제 ==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였다. 형식적으로 수석총무와 정치부장을 선출하였지만 수석총무나 정치부장은 형식적인 대표였고, 외교분야는 당 외교부장, 경제분야는 당 경제부장, 산업분야는 당 산업부장, 농림분야는 농림부장이 주관하는 등의 형식이었다. 또한 각 부처의 총무와 부총무, 부원이 있었고 정치부원이 외교부원을 겸하기도 하고, 각 부장이 타 부의 부원이나 부총무, 또는 각 시도지구당 위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945년]] [[10월 25일]] 한민당은 긴급간부회에서 신탁관리제 실시 절대반대를 결의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0_25_0130|제목=한민당, 긴급간부회에서 신탁관리제 실시 절대반대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허정]]은 한민당은 총무 중심의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였다고 증언하였다.<ref name="ghojong05">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5페이지</ref> [[조병옥]]은 '한민당은 집단지도체제인 8총무제를 채택하고 수석총무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피선하고 총무에는 [[김병로]], [[이인]] 등과 나도 그 8총무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ReferenceA"/>'고 하였다. 이어 각 도의 시도지구당 위원장을 선출하였다.
 
[[1945년]] 12월 중순, [[국일관]]에서 술자리 겸한 임시정부 요인 환영회가 한국민주당에 의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익희]]가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발언했다. 그러자 한민당에 [[장덕수]]가 반발하여 '그렇다면 나는 어김없이 숙청감이군 그래?'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신익희는 '어디 설산([[장덕수]]) 뿐인가?'라고 맞받았다. 보고있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여보, 해공([[신익희]]), 표현이 좀 안됐는지 모르지만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소리가 나오는거요?'라고 말하면서 '[[중화민국의 역사|중국]]에서 궁할때 뭣을 해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라.'며 기선제압을 했다고 한다. [[송진우 (1890년)|송진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권위가 필요했을 뿐, 진정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를 봉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민당 발기위원이자 창당 멤버이기도 한 [[허정]]은 당수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지 않았던 것만 놓고 보더라도 한민당은 민주적인 정당이라고 봤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한국 최초의 민주적 정당이었다. 민주주의의 구현을 당이 노선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정당 운영도 민주적이었다 고 하였다.
<ref name="ghojong110">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10페이지</ref> 다수의 의견과 함께 소수의 의견도 존중되면서 그 의견이 민주적 방식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당원 자치의 당내 민주주의가 확립되어, 1인 중심의 독선적 당 운영은 있을 수가 없었다.<ref name="ghojong110"/> 또한 [[허정]]은 한민당이 각 부서의 자치권, 각 시도지구당의 자치권을 인정한 것과 어설픈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 역시 한민당이 갖고 있었던 민주적인 시스템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945년]] [[12월 18일]] 한민당 총무 [[백관수]]의 집에 수류탄투척사건이 발생했다. 같이 식사 중이던 한국민주당 총무 [[김병로]] 외 세 사람이 같이 암살을 당할 뻔했다. 金동대문서장은 "나도 현장을 조사한 결과 이 수류탄사건은 회합을 예지하고 계획적으로 실행한 것"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18_0130|제목=한민당총무 백관수집에 수류탄투척사건 발생|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정치 활동 ==
=== 출범 초기 ===
한민당은 [[1945년]]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하였는데, 당수제 또는 최고위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총무제를 채택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1887년)|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 경기의 [[김도연 (1894년)|김도연]],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1884년)|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 당내 탁치 찬반론 갈등 (1945) ===
[[1945년]] [[10월 20일]] [[고하 송진우|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라는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지사들, 사실상 임정 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파일:Anti-Trusteeship Campaign.jpg|140px|왼쪽|섬네일|신탁통치 반대운동 집회.]]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인사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부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반탁론과 [[송진우 (1890년)|송진우]]의 탁치불가피론으로 나뉘었다.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개최 대회에 대표를 참석시켜 [[이승만]]의 의견에 동조하였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한민당 초대 수석총무였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12월]]말 송진우는 한 미국계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주둔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310쪽</ref>
=== 신탁통치 반대 사태와 미소공위 ===
{{참고|신탁통치 반대 운동}}
==== 탁치 찬반론 당내 갈등 ====
[[파일:송진우 암살 보도.jpg|섬네일|200px|오른쪽|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송진우 암살을 보도]]
[[파일:Anti-Trusteeship Campaign.jpg|140px|왼쪽|섬네일|신탁통치 반대운동 집회.]]
 
[[송진우 (1890년)|송진우]]는 미군정에 도전할 경우 우익 진영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제3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탁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지만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자신을 적극적인 탁치론자나 신탁통치에 지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여론을 불쾌히 여겼다.
[[1945년]] [[12월 27일]]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계획에 한민당은 당차원에서 반대했다. 그러나 초대 수석총무였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신탁통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일단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한민당은 당수인 송진우의 의견과 갈등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오후 12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는 김구에게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라고 말했다.<ref name="브루스커밍스1">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6</ref><ref name="고하1">고하 송진우 선생전 69, 대한민국사 I 713~714</ref>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남북한 분할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 송진우 피살 사건 및 김구 세력과의 갈등 (1945) ===
[[12월 29일]] 저녁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경교장을 찾아와 김구와 만났다. 송진우의 전기작가는 그가 김구로 하여금 신탁통치 문제에 관하여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피하게 하려고 시도했다고 말하였다.<ref name="브루스커밍스1">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6</ref><ref name="고하1">고하 송진우 선생전 69, 대한민국사 I 713~714</ref> 브루스커밍스에 의하면 김구는 경교장을 방문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반탁운동에 가담하도록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것이 분명하며 송진우가 여진히 미국치하의 후견기간을 주장하고 있다는 확신을 받은 것 같다고 보았다.<ref name="브루스커밍스1"/><ref name="고하1"/> 송진우는 5개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다.
[[파일:송진우 암살 보도.jpg|섬네일|200px|오른쪽|송진우 피살 내용을 다룬 1945년 12월 31일자 동아일보 지면]]
[[1945년]]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송진우 피살 사건]]이 발생되었다. 범인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0_0180|제목=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민당은 일단 [[원세훈 (1887년)|원세훈]]을 위원장에 추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5_12_30_0170|제목=한민당, 송진우의 피습 급서에 대해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 사건이 전해지자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은 [[송진우 (1890년)|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ref name="songam1">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ref> 사건 전날의 정황상 한국민주당 측도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였고,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과 민주당 측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파일:Kim seong soo 1914.jpg|섬네일|오른쪽|140px|한국민주당 제2대 수석총무 [[김성수 (언론인)|인촌 김성수]]]][[1946년]] [[1월 7일]] 오후 4시 한국민주당은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를 수석총무 겸 중앙집행위원회 총무로 선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7_0060|제목=金性洙, 한민당 수석총무로 피선|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한민당의 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로 바꾸었다.<ref name=":8">{{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20|제목=Ⅰ. 韓國民主黨의 조직구조와 그 특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6년]] [[1월 8일]] 한민당은 반탁을 일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1_1946_01_08_0180|제목=한민당, 반탁을 일관한다는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민주당 일각에서는 신탁통치를 놓고 탁치에 반대하는 시각과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역설하는 입장이 나타났는데, 전자의 대표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였고, 후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였다. 우선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고 충고했다. 이는 [[12월 29일]] 저녁 12시부터 열린 [[경교장]]의 회의에서도 표현되었다.
 
한편 [[1946년]] [[4월 9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다. 이날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ref name=":1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10|제목=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날 경찰 취조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현우]]는 1941년 12월에 [[와세다 대학]] 정경과를 졸업하고, 1943년 5월경 동경에서 국수주의자 일인 [[나카노 세이고]](中野正剛)와 [[고이치 호즈미]](穗積五一)을 숭배하여 이와 5년간 직간접으로 교양을 받고, [[고이치 호즈미]]의 지지로 재일조선인 유학생 5천 명으로 조선독립연맹(朝鮮獨立聯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한 자인데, 당시 일본경비청의 탄압이 심하므로 [[고이치 호즈미]]의 지도로 [[한현우]]은 일본국체연구소(日本國體硏究所)라는 간판을 내걸고 일본황실중심주의를 표방하다가 1944년 3월에 비밀이 탄로되어 인심교란죄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4년을 받은 후 1945년 2월 25일경 강원도 춘천 [[한현우]]의 처가집에서 수양하다가 1945년 8월 17일 상경하여 시내 종로 2정목 마포 노량진 신당정 등으로 전전하였다. [[한현우]] 등은 1945년 11월 초부터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매국노로 규정하고 암살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12월 말 신탁문제가 일어나 격분하여 12월 30일 오전 6시 10분경 [[송진우 (1890년)|송진우]]를 먼저 암살한 것이었다.<ref name=":1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20|제목=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들에게 총을 준 사람은 [[전백]](全栢)으로 '영화(永和)기업사'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사장을 지냈던 사람이었다.<ref>{{웹 인용|url=http://www.goha.or.kr/materials/lawtimes.html|제목=법조 50년 야사 - 해방공간의 요인암살사건|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131030148/http://www.goha.or.kr/materials/lawtimes.html|보존날짜=2016-01-31|url-status=dead|확인날짜=2013-04-24}}</ref>
[[12월]]말 그는 한 미국계인사와의 인터뷰에서 주한 미군이 주둔해야 함을 역설하기도 한다.
 
[[1946년]] [[9월 3일]] [[한현우]]에게 일본제 권총을 내어준 [[한현우]]의 지도자 [[전백]]에 관한 공판이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09_03_0070|제목=宋鎭禹암살범 韓賢宇의 지도자 全栢의 공판|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7년]] [[2월 14일]] [[한현우]]는 최종언도공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2_14_0060|제목=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등 4명에 대한 최종언도공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8년]] [[9월 5일]] [[한현우]]는 옥중 인터뷰에서 "송진우씨 암살사건에 관해서는 범행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심경의 변화가 없습니다"라고 했고 자신이 "대한임정 지지자"라고도 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05_0090|제목=宋鎭禹 암살범 韓賢宇, 朝鮮精版社사건 朴洛鍾 옥중 인터뷰|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50년]] [[한현우]]는 마포형무소 복역 중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북한군]]에 의하여 석방되었다가 [[서울 수복 전투|9·28 서울 수복]] 당시 자수하지 않고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22_1951_08_21_0030|제목=한현우, 안두희의 근황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논란|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60년]]대에 이르러 신원이 확인되었는데, 한홍건(韓弘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일본 여성과 결혼하였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3684964&sid1=001|제목="朴대통령이 古下암살전과 말소해 줬다"|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인용문2|우리들은 미군이 적어도 2년 동안은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만일 미군이 지금 떠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게 될 염려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은 우리들보다 조직이 더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ref>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310쪽</ref>}}
 
=== 우익진영 대통합 거부 (1946) ===
미군정에 도전할 경우 우익 진영에게 정권을 넘기지 않고 제3의 세력에게 정권을 넘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탁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지만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자신을 적극적인 탁치론자나 신탁통치에 지지하는 것으로 몰고 가는 여론을 불쾌히 여겼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은 미국의 예상대로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소련]]은 “북한 주민도 모스크바 협정문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 (1890년)|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8/25/2006082577002.html|제목=[대한민국 건국의 영웅들(3)] 조만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주간조선}}</ref>
==== 송진우 암살 사건 ====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임시정부]] 측의 면담은 [[12월 30일]] 새벽4시에 끝났으며 두 시간 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자택에서 청년단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1945년]] [[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자택에서 [[한현우]](韓賢宇) 등의 저격을 받고 암살당했다.<ref name="강준만15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152페이지</ref><ref name="커밍스288">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287~288페이지</ref> 범인은 [[한현우]], [[유근배]] 등 6명이었고 이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이들에게 총을 준 사람은 전백으로 '영화(永和)기업사'라는 해운회사를 차려 사장을 지냈던 사람이다.<ref>{{웹 인용 |url=http://www.goha.or.kr/materials/lawtimes.html |제목=법조 50년 야사 - 해방공간의 요인암살사건 |확인날짜=2013-04-2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131030148/http://www.goha.or.kr/materials/lawtimes.html |보존날짜=2016-01-31 |url-status=dead }}</ref> 전백은 배후는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족주의진영 통합에 나선 [[한국독립당]]은 [[1946년]] [[3월 22일]] [[국민당 (1945년)|국민당]]과의 통합을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3_22_0030|제목=한국독립당과 국민당 합동선언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4월 7일]]에는 [[한국독립당]], [[국민당 (1945년)|국민당]], 한민당, [[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를 하였는데, 한민당측이 '중앙위원수와 인선배치가 명확치 않아 당을 헌납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여 통합에 난항을 겪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7_0040|제목=한독·국민·한민·신한민족당 등 4당 합동교섭위원 합당 협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에 [[김구]]는 [[4월 9일]] 이승만을 방문하여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당에 얽매이지 않은 거국적이고 초당적인 국민운동의 필요'하다며 거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09_0040|제목=김구·이승만이 회합하고 정당 불참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4월 18일]] [[한국독립당]]으로의 통합에 [[국민당 (1945년)|국민당]], [[신한민족당]]만이 참여하였고 한민당은 이탈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4_18_0130|제목=한독·국민·신한민족당 합동,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암살한 암살범중의 한 사람인 [[한현우]]는 후에 송진우가 미국의 후견을 지지한 것이 자신의 저격 동기였다고 말했다.<ref name="커밍스1">일월총서 71 한국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김자동옮김, 최옥자펴냄, 일월서각) 2001년판 287</ref> [[한현우]]는 진술하기를 배후는 없었으며 [[김구]]와 [[이승만]]이 자신들을 의거를 단행한 의사로 칭찬해 주었다고 주장했다.<ref name="강준1523">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152~153페이지</ref><ref>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2004) 287페이지</ref><ref>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357페이지</ref>
 
===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 지지 (1946) ===
다른 증거는 [[한현우]]를 [[김구]]와 연결시켰고, [[브루스 커밍스]]는 한현우의 배후를 [[김구]]라고 보았다.<ref name="커밍스1"/> 미군정청 [[하지]] 사령장관은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 [[1월 1일]] 김구를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ref>백범어록(김구, 도진순 엮고 보탬, 돌베게, 2007.11)의 67페이지</ref>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암살 이후 한민당은 탁치 문제에서는 반탁을 주장하였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론을 취소하고 [[김구]], [[한국독립당]]과 갈등하게 된다.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의 암살 후 한민당은 혼란에 빠졌지만 곧 [[원세훈]]과 [[백관수]]를 임시 당수로 선정하였다가 [[장덕수]]를 두 번째 당수로 선출한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전라북도|전북]] [[정읍시|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부터 남한단정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 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03_0080|제목=이승만, 정읍환영강연회에서 단정수립 필요성 주장|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6년]] [[6월 5일]] [[이승만]]은 전라북도 이리(익산)에서는"일반민중이 초조해서 지금은 남조선만이라도 정부가 수립되기를 고대하며 혹은 선동하는 중이다"라고 말했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05_0050|제목=이승만, 이리에서 남한단정수립에 대해 사견 피력|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러한 주장은 [[6월 25일]] 경기도 개성에서도 이어졌다.<ref name=":18">{{웹 인용|url=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0942&docId=5883350&categoryId=33385|제목=정읍 발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두산백과}}</ref>
한편 [[김구]]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암살을 기도<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 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이것이 [[미 군정]]의 첩보에 입수되기도 했다. 이는 김구나 임시정부에 대한 한민당의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통해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대 공산주의' 프레임을 띄웠으나 반응은 시원찮았다. [[1946년]] [[6월 5일]] [[한국독립당]], [[조선인민당]] 등은 즉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05_0010|제목=남조선단정설에 관해 한독당 반대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05_0060|제목=인민당총무국, 남한단정설 반대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11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의 [[아처 러취]]도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11_0110|제목=러취, 이승만의 단정설 등 당면문제에 대해 기자회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12일]] [[비상국민회의]]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은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이승만이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도 헛소문인 것 같다고 입장을 밝혔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12_0090|제목=비상국민회의 부의장 최동오, 당면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국민주당 등 소수만이 이승만을 지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07_0100|제목=한민당, 좌익계열의 남조선단독정부수립설 비난에 대해 반박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좌우합작위원회 ====
한민당은 [[미군정]] 주도로 진행되는 [[좌우합작위원회]]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방관하였다. 이때 한국민주당 측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표자를 파견했는데 [[원세훈 (1887년)|원세훈]], [[이순탁]], [[서상일]] 등을 좌우합작위원회의 한민당 대표로 파견하였다.
 
==== 미소공위좌우합작 7원칙 비판 및 대량 탈당 사태 =(1946) ===
[[1946년]]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 정식 출범을 전후로 한국민주당은 초지일관 [[좌우합작위원회]]를 비판 내지는 비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6_21_0150|제목=한민당 선전부장 함상훈,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에 대한 입장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2_1946_07_26_0090|제목=한민당, 좌우합작원칙의 초지일관 천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민당은 '좌우합작 7원칙' 중 토지개혁문제에 있어서 '유상몰수 무상분배'를 반대하고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장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한민당원들이 대량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07_0180|제목=좌우합작위원회, 합작7원칙과 입법기관에 대한 건의문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08_0340|제목=좌우합작 7원칙과 입법기관의 설치에 대한 각계 견해|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2_17_0180|제목=최근 국내정계 동향이 알려짐|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장덕수]]는 한민당의 정치부장으로 당의 이념을 정립하는 데 공이 컸다.<ref name="공위1">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황소자리, 2004) 224페이지</ref>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ref name="공위1"/> [[한국]]의 독립에 [[미국]], [[소련]] 등의 강대국의 입김이 배제될 수는 없으며, 이들 강대국을 실력으로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러나 [[장덕수]]의 설득은 실패했고, 그는 이 일로 [[김구]]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즉 [[1946년]] [[10월 8일]] 원세훈, 한흥주, 이매응, 이건웅, 주광성,<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08_0390|제목=한민당총무 원세훈, 합작7원칙 등에 대한 이념相違로 탈당 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0월 9일]] 한민당 청년부장 박명환(朴明煥), 공남헌, 현동완, 장공일, 이병헌, 최동식, 유흥산, 한학수, 이민흥, 정학용, 박태선, 한동수, 이상은, 이수억, 이정수, 한필수,<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09_0160|제목=한민당 청년부장 朴明煥 등 16명 탈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0월 10일]] [[이순탁]](李順鐸),<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10_0210|제목=李順鐸, 한민당 탈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0월 11일]] 김용국 등 17명이 탈당하였다. [[1946년]] [[10월 14일]]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급히 말을 바꿔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14_0160|제목=좌우합작과 입법의원에 대한 각 정당의 견해|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0월 21일]] [[김약수]], 손영극 외 89명,<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21_0050|제목=김약수, 손영극외 89인 한민당 탈당성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1월 28일]] 최양옥, 박용희, 김병수, 신현창 외 17명, [[12월 5일]] 김상규 외 중앙집행위원 4명과 대의원 1명과 당원 82명, [[12월 17일]] 박원식 등 58명 등 탈당 행렬이 계속됐다.<ref name=":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50_0010|제목=1. 한국민주당의 탈당사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파일:Jangdeoksu 1945.jpg|섬네일|오른쪽|170px|암살된 제2대 당수 [[장덕수]]]]
 
이 대량 탈당 사태로 인해 당은 왜소화됐지만, 오히려 당론이 통일되고 당내 결속이 강화되고 일원적인 당운영이 가능하게 되어서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1955) 때까지 극우노선을 꾸준히 견지하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0_13_0040|제목=한민당, 당원 탈당을 인정하고 당내 결속 위해 기구개혁 결의|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1185|제목=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60|제목=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맺음말|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7년]] [[5월]]부터 [[장덕수]]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여부를 놓고 김구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자신의 [[서울]] 제기동 자택을 방문한 [[배희범]], [[박광옥]] 등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이때 붙잡힌 배희범, 박광옥 등과 그들의 배후로 지목된 [[김석황]]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고,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자 국민회의 동원부장, 임시정부 등에도 관여하였다. 우파정당 통합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은 빠졌는데 우익정당 통합의 일환으로 한국독립당과 한국민주당의 통합 시도에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찬성하였으나 장덕수는 반대하였다.<ref name="아아아앙">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66쪽.</ref> [[장덕수]]는 통합하는 것은 당을 통째로 임시정부에 갖다 바치는 일이라며 반대하였다.<ref name="아아아앙"/><ref>박태균, 《현대사를 베고 쓰러진 거인들: 해방정국과 4인의 요인 암살, 배경과 진상》(지성사, 1994) 123~124쪽.</ref>
 
[[1946년]] [[11월 8일]] 한민당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입법기관([[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립된다고 하자 이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1_08_0200|제목=한민당,입법의원에 대한 김규식 담화를 반박하는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그 이후에도 좌우합작위원회를 계속 견제하였다.
[[1946년]]부터 한민당은 미소공위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국제연합(UN)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년]] [[9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한민당은 유상매수 유상분배를 주장했다. 저렴한 대가 내지는 국가에 토지세를 상환해서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모든 농민에게 자기 땅에 씨앗을 뿌리는 기쁨을 주기 위해 농민이 땅을 사서 사유화하는 유상분배의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ref name="heojong109">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9페이지</ref> 가난한 농민을 위해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땅값을 국가에 장기 분할로 갚아나가고, 지주는 토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산업 자본가로 전환하는 토지의 합리적 재편성을 의도했던 것이다.<ref name="heojong109" />
[[1947년]] [[11월]] [[김구]]는 [[이승만]]의 노선에 협조하는 대신 [[김구]]의 국민의회 중심으로 [[우익]]이 단결하는 데 [[이승만]]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그러나 [[장덕수]]의 암살로 [[김구]]와 [[이승만]]·한민당의 단결은 무산되고 말았다.<ref name="서중석57">서중석, 《한국현대사》(웅진지식하우스, 2006) 57쪽</ref>
 
그러나 막상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되고 유상몰수 유상분배식의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니까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에 심한 반기를 들었고, [[농지개혁법]]이 농지에만 한정되고 임야 등은 제외된다는 점을 악용, 바닷가 논을 염전으로 바꿔 농지개혁 대상에서 벗어나는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짓을 벌인 사람이 바로 한민당 당수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였다.<ref name=":6">{{웹 인용|url=http://www.sigry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5784|제목=[한도숙칼럼]농지개혁|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식량닷컴|확인날짜=}}</ref>
=== 단정참여 후 야당화 ===
[[1946년]] [[6월 3일]]에 이승만이 정읍발언하였는데, 여기서 처음 언급한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한민당은 신속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한민당은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승만을 옹호하고 나섰다.
 
=== 각 세력과의 갈등 ===
[[1947년]] [[2월 5일]],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중도파 인사 [[안재홍]]이 임명되고,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미군정 기구에 중도파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한민당은 민정장관 안재홍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한민당의 공격은 너무 거셌으며, '1개월을 넘지 않는 동안 저 자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또한 각종 연설과 삐라 등으로 터무니없는 억지식 논리로 [[안재홍]]을 몰아붙여서 비방하였다. 심지어 [[미군정]]내에 한민당계 고위 관리들은 5월 하순 민정장관 [[안재홍]]이 내린 인사 발령까지 거부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3~44쪽</ref>
[[파일:Jangdeoksu 1945.jpg|섬네일|오른쪽|170px|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설산 장덕수]]]][[1946년]] [[11월 23일]] 김구는 [[서울신문]] 1주년 축사에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그 중 친일청산에 관한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친일분자 숙청은 마땅하지만 그 죄상을 □衝하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용서할만한 자도 기어이 매장하라고 한다. 왜적 이상으로 나쁜 친일분자는 감히 머리도 들지 못하고, 죄가 비교적 가벼운 무리도 자숙하는 태도를 보이건만,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해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면서 도리어 날뛰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질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3_1946_11_23_0030|제목=김구와 허헌, 정치적 포부 피력|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사실상 한국민주당을 지목하여 비난한 것이었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중도파 인사 [[안재홍]]이 임명되고,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미군정 기구에 중도파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한민당은 민정장관 안재홍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한민당의 공격은 너무 거셌으며, '1개월을 넘지 않는 동안 저 자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또한 각종 연설과 삐라 등으로 터무니없는 억지식 논리로 [[안재홍]]을 몰아붙여서 비방하였다. 심지어 [[미군정]]내에 한민당계 고위 관리들은 5월 하순 민정장관 [[안재홍]]이 내린 인사 발령까지 거부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43~44쪽</ref>
[[파일:Kim seong soo 1914.jpg|섬네일|오른쪽|140px|3대 당수 [[김성수 (언론인)|인촌 김성수]]]]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당시 (1947) ===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문제를 놓고 논란이 있자, '참여하되,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31~32쪽.</ref>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를 놓고 우익진영이 분열되었다. [[5월 30일]]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방문한 민주당 [[장덕수]]에게 참가보류를 강경히 주장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5_30_0090|제목=한민당 장덕수 등, 공위문제로 이승만 방문|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4일]] 반탁진영 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참가 불참 여론이 반반으로 갈렸다. 이때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를 주장한 단체와 대표는 한국민주당 [[장덕수]], 大韓勞總 [[전진한]], 靑年總同盟 [[유진산]], 全靑 이성수(李成株), 全女總盟 [[황애덕]](黃愛德), 獨促婦人會 박승호(朴承浩), 天道敎輔國黨 이진해(李鎭海), 己未獨立 [[류홍 (1899년)|류홍]], 儒道會 이재억(李載億), 黃海會 함석훈(咸錫勳)이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04_0060|제목=반탁진영 대표자대회,미소공위대책위원회를 구성|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10일]]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를 선언하며 우익진영의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10_0120|제목=한민당,공위참가에 대해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에 [[이승만]]은 "공위 참가할 사람은 5호 성명에 서명(찬탁)하기로 되었는 즉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중략) (5호 성명에)서명해서 (신탁통치를)지지하기로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이니... (후략)"라며 한민당을 비판하였다.<ref>정해구, 《분단과 이승만:1945~1948》〈역사비평〉제32호 (1996년봄) 275쪽.</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09_0080|제목=이승만,공위에 대해 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13일]]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 대한 우익의 참가를 종용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13_0120|제목=한민당 당면문제에 관해 담화|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20일]] 한민당은 우익진영의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를 종용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의 권위를 앞세운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0_0130|제목=한민당선전부,남북총선거에 의한 임정수립 주장 담화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그러나 정작 [[한국독립당]] 등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은 [[임정수립대책협의회]]에 참여하지 않았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07_28_0040|제목=임정수립대책협의회, 공위양측대표에게 서한 발송|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6월 22일]] [[한국독립당]]은 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3당으로 분립하였다. [[한국독립당]]이 미소공위에 불참한다고 하자, 이에 반발한 박용희·[[안재홍]] 등 혁신파는 [[신한국민당]]을, 권태석 등 민주파는 [[민주한독당]]을 각각 결성하여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22_0050|제목=한독당, 공위 참가여부문제로 3당으로 분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렇게 우익진영은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 참가여부 문제로 [[한국민주당|한민당]] 중심, 이승만·[[김구]] 중심, [[유림 (1894년)|유림]] 중심의 3파로 분립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4_1947_06_18_0090|제목=우익진영 공위참·불참을 계기로 3파로 분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민당은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찬성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가하였지만, [[1948년]] [[7월]] [[이승만]]은 정부 조각 후 한민당계열 인사에 재무장관직 1석만을 부여하였다. 이에 한민당은 [[이승만]]에 반발하였고, 한민당은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한민당에는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 [[허정]], [[이기붕]]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1948년]] [[8월]], 한민당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즉시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 보다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던 윤치영은 이승만과의 개인적 인연 외에도 자신의 신념 때문에 한민당을 탈당하게 된다.
 
[[1947년]] [[10월 18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 수립 지지로 선회했다. 이어 그는 [[유엔]]에 호소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판단, [[1947년]] [[9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와 함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찾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함을 주장하였다.
[[윤치영]]은 한민당을 탈당하면서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정상배, 정치 모리배, 양아치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었고, 이는 한민당 계열이 윤치영을 두고두고 미워하는 원인이 된다. 훗날 [[1963년]] [[12월]]과 [[1966년]] 윤치영은 총리 내정자로 지명되었지만 한민당 출신 국회의원과 지식인들의 맹렬한 반대로 총리지명 자체가 철회되고 만다. 또한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윤치영]]이 [[박정희]]를 단군 이래의 최고의 지도자라 예찬한 것을 두고도 윤치영은 단군 이래의 최대의 간신이라고 응수한다. 한민당 출신들은 [[윤치영]]이 한민당에 극언을 퍼붓고 탈당한 점과 [[이승만]]의 절대 지지, 그의 [[일민주의]] 노선 지지, 나중에는 박정희를 적극 지지한 것, 3선 개헌과 유신을 적극 지지한 것을 두고 극도로 미워하게 된다.
 
=== 김성수 암살 미수 사건 (1947) ===
== 민주국민당과 통합 ==
[[1947년]] [[11월 28일]] 호남선 열차에서 [[김성수 (언론인)|김성수]]가 암살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ref name=":19">{{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3_0020|제목=경무부장 조병옥, 우익요인 암살미수사건의 진상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단정수립론에 적극 지지하던 한민당은 UN 소총회의 결의 결과 발표와 [[미군정]]법령 제175호 및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90명의 입후보자 중 29명의 당선으로 총유효투표의 13%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47년]] [[12월 23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조선해양청년단(朝鮮海洋靑年團) 소속의 백영기(白英基), 문균석(文均錫) 등이 [[여운형 피살 사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와 [[조병옥]]을 노렸던 거라고 밝혔다.<ref name=":19" />
[[1948년]] [[5월 30일]] [[제헌국회]] 개원 이후 한민당은 국무총리 지명과 조각과정에서 당수인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를 총리로 생각하였지만 [[이승만]]은 이를 외면하였고, [[윤치영]] 등 10여 명의 의원이 탈당함으로써 원내세력도 위축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권]]의 초대 총리 인사에서 번번히 반대를 하기도 했다.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에 첩보에 의하면 [[김구]]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암살을 기도하려다가 실패하였다고 한다.<ref name="seo535">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535</ref>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 [[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해체되었다.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은 [[민주당 (1955년)|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 [[장덕수 피살 사건]]과 김구 세력과의 결별 (1947) ===
== 정책 비전 ==
[[1947년]] [[12월 2일]] 저녁 6시 50분경 [[장덕수]]가 자택인 [[청설장]](聽雪莊)을 방문한 박광옥, [[배희범]](裵熙範)의 총격을 받고 병원으로 입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2_0070|제목=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피살|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자본의 국영, 국유화 ===
한민당은 경제관에 대하여 산업자본의 국유화, 국영화를 제시했다. 그러나 지주들이 주를 이룬 만큼 영구 국영화는 아니고 어느정도 민족 자본이 형성된 뒤에 민영화를 서서히 추진하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당 강령 6조에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라는 항목이 있었다.
 
[[1947년]] [[12월 4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 경찰은 박광옥, [[배희범]]을 체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04_0050|제목=장덕수살해범 朴光玉 일당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허정]]에 의하면 하민당이 중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정책으로 내세운 것은 한민다이 사회주의 경제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ref name="heojong108">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8페이지</ref> 고 해명했다. [[허정]]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구현이 한민당의 지상과제인 만큼 경제정책도 기회 균등이 보장되는 자유경쟁 체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많은 산업시설을 인수할 만한 민족자본이 형성되지 못한 때에 자유경쟁의 원칙만을 고집하면 경제적 혼란이 오고, 이에 따라 기업 윤리가 혼미에 빠지고 급조 재벌이 횡행하여 민생이 위협받을 것이므로, 건전한 민족자본과 기업윤리가 형성될 때까지 국영 또는 통제 관리를 잠정적으로 실시하려고 한 것이다.<ref name="heojong108"/>
 
[[1947년]] [[12월 23일]]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는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애국자들이 검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5_1947_12_23_0030|제목=국민의회, 장덕수피살사건과 관련 애국자의 검거에 대해 유감표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토지 문제에서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과 그 계열은 경자유전을 말하면서도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토지의 국유화를 w전제로 해서 가능한 만큼, 토지의 소유권이 농민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다.<ref name="heojong108"/>
 
[[1948년]] [[1월 16일]] 수도청장 [[장택상]]은 장덕수 살해 혐의로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위원 [[김석황]]을 체포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16_0090|제목=장택상, 장덕수살해 관련혐의로 한독당중앙위원 김석황 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농민은 단지 경작권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농민은 남의 땅 경작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는 땅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땅에 자기가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기쁨을 희구했으며, 남의 땅에 씨앗을 뿌리고 거둬들이는 슬픔을 바라지는 않았다. 따라서 지주가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바뀌는 차이밖에 없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경자유전의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다.<ref name="heojong109">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9페이지</ref> [[허정]]과 한민당은 공산당이 말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완전한 국유화 국영화는 농민을 소작농으로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광옥은 [[종로경찰서]]의 경사로 근무하는 [[경찰관]]이었다. [[배희범]]은 연대상과 2년생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김석황]]은 [[한국독립당|한독당]] 중앙위원이자 [[비상국민회의|국민의회]] 정무위원 겸 동원부장이자 대한보국의용단(대한독립의용단) 단장이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에 관여한 인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이었다.
한민당은 유상 매수 또는 유상 분배를 주장했다. 저렴한 대가 내지는 국가에 토지세를 상환해서 갚아나가는 것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은 모든 농민에게 자기 땅에 씨앗을 뿌리는 기쁨을 주기 위해 농민이 땅을 사서 사유화하는 유상분배의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ref name="heojong109"/> 가난한 농민을 위해 국가가 지주로부터 토지를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땅값을 국가에 장기 분할로 갚아나가고, 지주는 토지를 매각한 자금으로 산업 자본가로 전환하는 토지의 합리적 재편성을 의도했던 것이다.<ref name="heojong109"/>
 
[[1948년]] [[1월 21일]] 한국민주당은 [[임정수립대책협의회]]를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 사실상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시 정부]] 측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1_21_0180|제목=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로 개칭|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미군정 협력 문제 ===
미군 주둔 후 한민당은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여부를 놓고 고민하였다 한다. 한민당은 창당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추대하기로 결의하였고, 임정 요인들을 잠재적 영수로 추대했다. [[조병옥]]에 의하면 미군정에 협력하느냐를 놓고 한민당에서는 처음에 쉽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졌다고 한다.
 
[[1948년]] [[2월 26일]] 군정장관 [[윌리엄 F. 딘]]은 [[김석황]], 조상항(趙尙恒), 신일준(辛一俊), 손정수(孫禎洙), 김중목(金重穆), 최중하(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조엽(趙燁), 박정덕(朴鼎悳)이 장덕수 피살 사건의 범인이라고 발표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2_26_0030|제목=딘, 장덕수사건진상 등 제문제 문답|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카이로와 포츠담 선언에서 의하여 한국은 곧 독립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한국민주당은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우리 한국민주당이 미군정에 협력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반대하느냐 하는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데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아 한국은 군정 단계의 훈정기(訓政期)를 거치지 않고서는 치안유지를 할 수가 없고, 또 한반도의 적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 한국민주당 수뇌부에서는 와신상담의 격으로 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ref name="ReferenceA"/> 이라는 것이다. 이후 한민당은 미군정의 사실상의 여당의 기능을 하였다.
 
[[1948년]] [[3월 4일|3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 제1회 공개재판에서 [[미군]] 검찰은 권총·사진 등과 함께 [[김구]]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의 '피고인 진술서'를 증거로 제출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2_0110|제목=장덕수 암살사건 1회 공개재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김구가 [[장덕수]] 암살사건의 배후 혐의로 [[미군정]]의 재판을 받게 되자, [[건국실천원양성소]] 소원 50여 명은 혈서를 써서 군정청에 항의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95쪽</ref>
== 논란과 의혹 ==
=== 공산당 습격설 ===
한민당이 창당될 때 조선공산당원 일부가 창당대회장을 습격하여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한때 유포되었다. 그러나 한민당 창당 발기인의 한사람인 [[허정]]은 이를 두고 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1948년]] [[3월 8일]] 미국 군율재판 위원회는 북미합중국대통령 [[해리 S. 트루먼|트루만]]의 명의로 1948년 [[3월 12일]] 오전 9시에 출정하라는 소환장을 김구에게 발부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8_0120|제목=장덕수 살해사건 제5회 공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같은 날인 [[3월 8일]]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김주석 부하에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범죄로 김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ref name=":3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08_0060|제목=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허정]]에 의하면 '한민당 창당과 관련하여 덧붙여서 말해두어야 할 것은 창당대회 때 [[공산당]]의 습격을 받았다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서이다. 내 기억으로는 공산당의 습격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고 하였다.<ref name="ghseos107">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7페이지</ref> 그 이유로 [[허정]]은 '그 때만 해도 해방 직후여서 좌우의 대결은 물리적인 힘의 대결로 번지지는 않았을 때이다. 다만 이념상의 문제, 정책상의 문제로 대결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실력 행사까지 벌이게 된 것은 시일이 좀더 지난 다음이었다<ref name="ghseos107"/>'고 하였다.
 
[[1948년]] [[3월 12일]] 미군 군사법정에 증인심문을 받았다. 김구를 심문한 [[미군정]]청 [[군법무관]]들은 [[대위]], [[소령]], [[중령]]급이었다. "(問) 선생의 제자격인 피고인들이 진술한 것마다 왜 한결같이 선생과 관련한 내용으로 부합 일치될까요? (答) 알 수 없지요. 그러니까 모략이라 생각됩니다." "(問) 누구의 모략이란 말이요? (答) 그것을 이루 다 말하자면 모단체나 개인에 관한 것이 나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왜놈 이외에는 죽일 리가 없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12_0050|제목=김구, 장덕수암살사건 8회 재판의 증인심문에서 관련성 부인|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허정]]은 한민당 창당대회 때 [[박헌영]]이 내빈으로 참석하여 창당을 축하한다는 축사를 한 것을 증언하였다. 한국민주당 창당대회 때만 하더라도 [[박헌영]]이 참석하여 내빈 축사를 했다. 우두머리는 축사를 하고 졸개는 습격을 하는 일은 없었다<ref name="ghseos107"/> 는 것이다.
 
[[1948년]] [[3월 15일]] 오후 공판에서 [[배희범]]은 "정권을 잡기 위하여 신탁을 시인하는 미소공위에 참가한 것", "해방전 공산당은 민족주의자들로 조직되었는데 [[장덕수]]는 그때 공산당의 이론분자였다"는 것, "일본헌병대의 촉탁 국민총연맹의 고문으로 학생들을 격려하여 학병을 장려하는 등 친일적 행동을 한 것" 때문에 [[장덕수]]를 암살했다고 증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15_0140|제목=장덕수 살해사건 9회 군률재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지역정당 논란 ===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라고 비난받아 왔다.
 
[[1948년]] [[3월 17일]] 제11회 공판 내용에 따르면 박광옥, [[배희범]] 등 용의자들은 장덕수 등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1947년 8월 한양의원에서 [[대한혁명단]]을 조직하였다. 최중하의 진술에 따르면 원래 [[안재홍]]·[[배은희 (1888년)|배은희]]·[[장덕수]]를 암살하려 했으나 "안재홍씨는 찬탁을 부르짖은 죄는 크나 그후 남북통일을 제창하게 되었으므로 용서하였고 배은희는 그 정치적 실력이 크지 못하므로 제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으로 결정되어 오직 장덕수 1인을 죽이기로 된 것"이었다고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3_17_0080|제목=장덕수살해사건 11회 군률재판 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를 두고 창당 멤버인 [[허정]]은 한민당을 가리켜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니 친일파의 소굴이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의 찬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ref name="heojong109"/> 고 해명하였다. 한민당의 주요 인사는 전북 고창(또는 부안) 출신의 김성수, 김병로, 금산의 임영신, 유진산, 전남 담양 출신 송진우, 백관수, 백남훈, 전남 영암 출신의 김준연, 전북 고창 출신의 이철승 외에도 황해남도 해주 출신의 장덕수, 경북 영천 출신의 이활, 충청남도 출신의 윤보선, 윤치영, 충남 천안 출신의 조병옥, 서울 출신의 원세훈, 이기붕, 김도연, 대구 출신 서상일, 경북 출신 장택상, 이인, 부산 출신의 허정, 김약수 등이 있었다.
 
[[1948년]] [[4월 1일]] 제21회(최종) 공판에서 [[김석황]], 趙尙恒, 辛日俊, 孫禎洙, 金重穆, 崔重夏, 박광옥, [[배희범]] 등 8명에게 교수형이 선고됐고, 趙燁, 朴鼎悳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01_0210|제목=장덕수살해사건 피의자 8명에게 사형 언도|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조병옥]]은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나 [[인촌 김성수]]는 정당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나 또는 당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지방적인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 본위 실력 본위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특히 정당 및 사회단체 조직에 있어서는 그런 점에 d가장 유의하고 세심한 검토로서 전력을 다하여 주력하였던 것이다
<ref>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81페이지</ref> 라며 지역 정당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한편 [[허정]]은 한민당이 전라도 당, 호남 갑부 정당이라는 비난은 [[공산당]]이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8년]] [[4월 22일]] [[존 하지]]는 군사위원회의 판결을 검토 후 중앙청공보부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최후적 조치를 발표하였다. "1) 박광옥 및 [[배희범]]의 사형은 승인하나 그 집행은 추후 재심할 시까지 보류함. 2) [[김석황]]·申一俊·金重穆·崔重夏의 사형은 종신형으로 감형함. 3) 趙尙恒 및 孫禎秀의 사형은 10년형으로 감형함. 4) 趙燁 및 朴鼎悳의 10년형은 5년형으로 감형함."<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6_1948_04_22_0110|제목=장덕수살해사건 군률재판에 대한 하지의 특별조치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친일파 정당 논란 ===
한민당은 창당 초기부터 친일파들을 일부 받아들인 것을 두고 논란거리가 되었다. 창당멤버의 한 사람인 [[허정]]은 일부 친일파의 수용을 인정하였지만 나름대로 엄선 기준이 있었다 한다. 그에 의하면 '일제 하에서 고급 관리를 지냈거나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아니었다.<ref name="hojong102">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2페이지</ref> 고 주장했다.
 
=== 내각인선 작업과 이승만과의 갈등 (1948) ===
[[허정]]은 또 정당 당원들의 총 수가 많다는 것이 정당의 우수성의 증명은 아닌 것 쯤은 알고 있었다.<ref name="hojong102"/> 며 당시 우리로서는 아무리 문호 개방을 원칙으로 하기는 했더라도 무원칙, 무분별하게 입당시켰던 것은 아니다. 단지 좀더 문을 넓게 열어 민족 진영의 대집결체가 되자는 뜻에서 인선의 원칙을 크게 완화시켰을 뿐이다.<ref name="hojong103">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3페이지</ref>
단정수립론에 적극 지지하던 한민당은 UN 소총회의 결의 결과 발표와 [[미군정]]법령 제175호 및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선거|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한민당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90명의 입후보자 중 29명의 당선으로 총유효투표의 13%의 의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1_09_0010|제목=<국회에 나타나는 지방의 프로필>|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8년]] [[7월 27일]] [[이승만]]의 국무총리 지명을 앞두고 국회의 3대 파벌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한민당, [[한국독립당]]계 무소속 의원들은 각각 [[신익희]],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조소앙]]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날 국회에서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 (1890년)|이윤영]]을 국무총리 지명자로 발표하며 인준을 요청하였고, 이에 각 파벌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승만이 [[이윤영 (1890년)|이윤영]]을 지명한 이유에는 통일을 다짐하는 의미에서 국무총리라도 이북 출신을 지명해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내 3대 파벌의 후보를 일부러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한민당 측 인사를 지명할 경우 탄탄한 원내 기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정 운영이 가능하지만 친일세력인 한민당계에 대한 비토 여론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예견되고, [[한국독립당]] 계열의 인사를 기용하면 다수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새 정부의 임정 법통 계승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명분 및 국민 지지를 다질 수 있으나 임정계와 비임정계의 갈등이 격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승만의 인준 요청 후 곧바로 [[이윤영 (1890년)|이윤영]]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에 대한 무기명 표결을 진행한 결과 총 투표수 193표 중 찬성 59표, 반대 132표, 기권 2표로 부결되었다. [[이윤영 (1890년)|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이승만은 [[이윤영 (1890년)|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에 입각시켰다. 내각 인선시 이승만은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법]]을 추진하였다. 농지개혁을 통해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한편 한민당에 몸담았다가 탈당한 윤치영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하였다. 윤치영의 이같은 비난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설득력을 얻는 원인이 되었다. 한민당은 미국, 영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한국 사회에 도입, 확산시키는 것을 당의 중점 사업의 하나로 선정했다. 당 강령으로 넣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 미국, 영국식 민주주의를 소개, 확산, 정착시킨다는 것을 공공연한 당원들의 목적으로 설정,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광수, 이범석, 안호상, 박정희 등의 인사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불쾌히 여겼다.
 
[[1948년]] [[7월 28일]] 이승만은 [[이화장]]에서 의원들이 정부 수립도 전에 진영 논리에 함몰돼 국가 재건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후 이승만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국무총리에 내정하였다. 그러자 [[1948년]] [[7월 30일]]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자택에 초대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7_30_0120|제목=이범석, 한민당위원장 김성수 방문 요담|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이범석 (1900년)|이범석]]에게 한민당 전원이 이범석 국무총리 인준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내각의 8석을 요구했고, 이범석은 그 제의를 수용하였다.
== 기타 ==
한편 [[2004년]] [[조선일보]]의 기자 이한우는 당시 친일파 논쟁이 격화되자, [[한나라당]]을 친일파로 공격하는 일부 좌파 진영의 주장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는 늘상 [[이승만]][[대통령]]이 [[친일파]]를 감싸안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승만]]이 감싸안았다는 [[친일파]]의 실체가 묘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했습니다. 한민당이었죠. 이승만이 건국과정에서 한민당과 함께 했고 건국이후에는 한민당을 내팽겨친 것은 알고계시겠죠. 그 한민당이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됐고 [[박정희]]때 [[신민당 (1967년)|신민당]]됐다고 거기서 쪼개져 [[김영삼]], [[김대중]]이 나왔다는거 아시죠.<ref name="leeahans">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83페이지</ref>"라면서 역으로 반박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 [[1948년]] [[7월 30일]] 한민당 내에선 [[이승만]]의 담화를 두고 내분이 발생했다. [[노익환]]은 "전일 대통령의 담화는 국회내에서는 세력이 불순한 동기로 뭉쳐있는 것 같이 해석되는데 이러한 대통령의 태도는 너무나 독선적이며 마치 제국주의에 있어서의 천황과 같은 태도라 할 것이다"라고 모욕했고, 이에 [[윤치영]]은 "우리의 영도자를 일제 천황에 비하여 모욕하는 언사를 쓰는 [[노익환]] 의원이야말로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ref name=":7">{{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7_1948_07_30_0140|제목=제36차 국회본회의, 이승만 총리승인 발언놓고 격론|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렇게 시작된 [[윤치영]]·[[허정]] 등 이승만 지지파와 [[김준연]] 등의 호남파간의 갈등은 결국 [[1948년]] [[8월 2일]]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했던 [[윤치영]]의 한국민주당을 탈당과 [[8월 3일]] [[정현모]] 등 9명의 국회의원의 탈당으로 이어졌다.<ref name=":5" />
한편 작가 [[장정일]]은 2004년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결실"이라는 주장을 풍자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44년 만의 진보정당의 국회 등원을 '50년 만의 결실'이라고 부정확하게 반올림하는 것 만큼이나 진보정당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을 놓고 '50년 전통의 야당'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수사가 분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ref>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74페이지</ref>'이라는 것이다.
 
[[1948년]] [[7월 31일]] 이승만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였다. 1948년 [[8월 2일]] 국회는 총 투표수 197표 중 찬성 110표, 반대 84표, 무효 3표로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임명 승인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국무총리 인준을 받자마자 "국무총리의 정견이라는 것은 대통령을 보필하여 대통령의 정견을 충실히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국무총리의 역할을 규정하였다.
[[장정일]]은 또,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쇠멸하는 진로를 놓고 '50년 역사의 전통 야당'을 지켜 달라고 읍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의 50년 전통 운운은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진보정당 의회 진출이라는 환희에 찬 구호와 달리 사기성이 짙은 것이다.<ref name="leeahans"/>'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새천년민주당의 기원을 1990년 1월 22일에 행해진 [[김영삼]]의 3당합당에서부터 찾지 않고 한민당, 민국당, 신한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고자 한다면 안티조선 논객을 자청했던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 등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ref name="leeahans"/>'고 지적한다.
 
[[1948년]] [[8월 2일]] 이승만은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건의한 [[김성수 (언론인)|김성수]] 천거 8명 중 3명만을 기용하였고 나머지는 무산시켰다. 심지어 한민당계는 [[김도연 (정치인)|김도연]] 1명만을 입각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밀월관계를 갖던 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후하게 대해주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한민당에는 [[이승만]]의 최측근인 [[윤치영]], [[허정]], [[이기붕]]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이승만]]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한민당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즉시 한민당을 탈당하였다. [[윤치영]]은 한민당을 탈당하면서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정상배, 정치 모리배, 양아치들이라고 극언을 퍼부었고, 이는 한민당 계열이 윤치영을 두고두고 미워하는 원인이 된다. 훗날 [[1963년]] [[12월]]과 [[1966년]] 윤치영은 총리 내정자로 지명되었지만 한민당 출신 국회의원과 지식인들의 맹렬한 반대로 총리지명 자체가 철회되고 만다. 또한 한민당 계열 인사들은 [[윤치영]]이 [[박정희]]를 단군 이래의 최고의 지도자라 예찬한 것을 두고도 윤치영을 단군 이래의 최대의 간신이라고 비난했다. 한민당 출신들은 [[윤치영]]이 한민당에 극언을 퍼붓고 탈당한 점과 [[이승만]]의 절대 지지, 그의 [[일민주의]] 노선 지지, 나중에는 [[박정희]]를 적극 지지한 것, 3선 개헌과 유신을 적극 지지한 것을 두고 극도로 미워하게 된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3&aid=0000027892|제목=탈북 청년이 말하는 ‘북한의 친일 청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주간조선|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7284&C_CC=AZ|제목=북한이 친일파 청산했다는 거짓말|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갑제닷컴}}</ref>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ref name="실록친일파2">{{서적 인용|제목=실록 친일파|저자=임종국|날짜=1991-02-01|출판사=돌베개|쪽=87~88쪽|기타=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ISBN=89-7199-036-8|출판위치=서울}}</ref> 초대 내각을 구성한 장관으로는 외무 [[장택상]], 내무 [[윤치영]], 재무 [[김도연 (정치인)|김도연]], 법무 [[이인]], 국방 [[이범석 (1900년)|이범석]](겸임), 문교 [[안호상]], 농림 [[조봉암]], 상공 [[임영신]], 사회 [[전진한]], 교통 [[민희식]], 체신 [[윤석구]], 무임소국무위원 [[지청천|이청천]](지청천)·[[이윤영 (1890년)|이윤영]] 등이 임명되었다.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도 무임소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절하였다.<ref>{{웹 인용|url=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50_0010_0020_0040|제목=(4) 제헌국회와 정부수립|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우리역사넷|확인날짜=2020-09-12}}</ref>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국회]] 내 친일 기득권 세력인 한민당의 횡포 뿐만 아니라, [[제주 4·3 사건|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여순사건]] 등 좌우 동족상잔까지 빈번해지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1950년 11월 23일 개각 시 [[장면]], [[김준연]] 등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한민당)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켰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9_1950_11_23_0070|제목=법무·농림·사회 등 3부 장관 경질|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 반민특위 방해 (1948) ===
[[1948년]] [[8월 16일]] 국회 특별법기초위원회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때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안'을 근거로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을 작성하여 국회본회의에 상정하였다.
 
[[1948년]] [[8월 19일]]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이 국회에 상정되자 국회 내의 공기는 찬반 양론으로 대립하였다.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 통과시 타격을 면치 못할 한민당은 '동 법안([[반민족행위처벌법]])이 필요는 하나 민중의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고, 또 동 법안은 너무나 추상적이니 법제위원회로 회부하자'는 의견을 냈다.<ref name=":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19_0170|제목=韓國民主黨의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대한 태도 주목|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8년]] [[8월 20일]] 민주당 선전부장 [[김준연]]은 "일제치하 36년 동안에 경제·산업·교육·행정·문예 등 각 방면에 있어서 그 세력과 접촉되는 부면이 너무도 광범하였기 때문에 그에 관련되지 아니한 편이 극히 적었던 것은 부인치 못할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문제를 너무 심히 추궁하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폐를 각출할 염려가 있을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국회의원 제씨의 특별한 주의를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ref name=":21">{{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0_0180|제목=韓國民主黨, 반민족행위처벌법과 관련하여 담화를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곽상훈]]은 "친일파를 자처하는 자는 벌써 자포자기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법안 범위를 더 축소하여 악질자에 한하자"고 말했다. [[이정래]]는 "초안에 규정된 자 중에는 애국자도 있다. 애국자일수록 관대하여야 한다"고 말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1_0130|제목=任永信 상공부장관과 일부 국회의원, 제1회 46차 국회본회의에서 친일파 처벌 축소를 주장|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8년]] [[8월 23일]] 한국민주당의 당수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을 강경히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회견을 청하여 친일파 문제를 광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했다.<ref name=":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6_0130|제목=친일파들,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협박과 돈으로 구명운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ref name=":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6_0080|제목=일부 친일파 재벌, 韓國民主黨에 자금제공하고 구명운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8년]] [[8월 26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자 한국민주당에 매월 20만 원 정도를 제공하던 친일재벌 金모씨는 돌연 동 법안을 완화 또는 무능화하도록 공작하는 자금으로서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한국민주당에 제공하였다.<ref name=":3" />
 
[[1948년]] [[8월 27일]] [[신익희]] 국회의장이 반민족행위가 있는 정부위원들의 임명을 승인하자 이에 반발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전원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7_0130|제목=제1회 50차 국회본회의, 국회의장의 반민족행위자 정부위원 임명 승인에 반발하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 전원 사임|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날 국회 본회의장에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대 삐라가 살포되는 사건도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7_0120|제목=제1회 50차 국회 본회의장에 반민족행위처벌법 반대삐라 살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훗날 [[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친일진상규명법)이 제정됐을 때 [[대한민국의 보수정당|보수계 정당]]은 친일파와 친공파의 후손이 친일진상규명위원이 될 수 없도록 "본인의 부모 및 조부모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친일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고, 1950년 6월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친공반민족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소명해야 한다"는 문구를 법안에 넣었다. 이는 한민당의 직접적인 후신이자 [[DJP연합]]의 파탄으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계열을 대거 흡수하여 당을 재건한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정당]]<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2&aid=0001984087&sid1=001|제목=진보의 실력파들, 그들은 왜 민주당으로 갔나?|성=|이름=|날짜=2012-06-19|웹사이트=|출판사=프레시안}}</ref><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47&aid=0001958341&sid1=001|제목="윤 동지"라고 불러준 DJ, 잊을 수 없다|성=|이름=|날짜=2009-08-21|웹사이트=|출판사=오마이뉴스}}</ref><ref name=":110">{{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353&aid=0000032275&sid1=001|제목=DJ 때 중도였던 민주당, 노무현·문재인 들어 좌편향 심화|성=|이름=|날짜=2018-10-20|웹사이트=|출판사=중앙SUNDAY|확인날짜=}}</ref>으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문구였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민주당계 정당]]은 해당 문구가 [[연좌제]]이자 위헌이라면서 삭제해버렸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2&aid=0000012266&sid1=001|제목=김용균, "친북반민족세력이 친일 조사해선 안돼"|성=|이름=|날짜=2004-07-27|웹사이트=|출판사=프레시안}}</ref> 이 밖에 상대 정당 인사들의 조상을 욕보이려고 조사대상과 범위를 늘였다 줄였다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결국 친일청산은 재차 실패하였다.
 
=== 여수·순천 사건 당시 (1948) ===
[[1948년]] [[11월 6일]] [[한국민주당]]은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다음은 [[국제신문]] 보도문의 일부이다.<ref name=":25">{{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1_06_0090|제목=韓國民主黨, 여순사건 계기로 정부공격을 강화|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국내 정계는 [[여수·순천 사건|전남사건]] 발발을 계기로 상당한 파동을 치고 있다. 국회는 단순히 이 사건의 책임소재를 현정부에 전가시킴으로써 [[대한민국 제1공화국|정부]]의 입장을 곤란에 함입(陷入)시키려 하고 있으며 정부로서는 이에 대처하는 정치적 태세를 갖추려 하고 있어 이 2대 정치 조류는 정부시책의 지연과 아울러 민생문제의 해결에 일대 암영을 투입하고 있는 것이 국내 작금의 정정(政情)이라고 정계소식통은 단정하고 있는데, 정부에 대한 국회의 태도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복선있는 정치행동으로 인하여 가지런(整然)치 못한 바 있어 국회에 대한 일반 인민의 재검토가 요청되고 있다.<ref name=":25" /> (중략) 이 국회의 비건설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정부시책의 불활발을 초래하여 민생문제의 해결도 상금 요원한 상태이며 따라서 인민의 원성은 고조되고 있는데 이 국회의 비사무적 태도는 드디어는 [[여수·순천 사건|여수사건]]에 봉화를 찌른 바 되어 정정(政情)은 慅然을 면치 못(未免)하게 되었다. 사실상 국회 내의 [[한국민주당|한민당]] 세력은 정권획득을 목표하고 정부에 적대하고 있는데 국회 내의 비한민세력까지도 의식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에 합작한 바 되어 작금의 국회는 법안의 조급 성립보다는 정부공격 내지 타도에 그 일체의 정력을 경도집중(傾倒集注)하고 있는 감이 농후하다. 더욱이 정부유지의 선결과제인 국군조직법 등을 헌신짝(弊履)와 같은 취급을 받고 오로지 정부 공격에 무사한 날(寧日)이 없는 것이 국회행동의 실제적 면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독점적 독단장이 되다시피 한 국회는 일련의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정치적 유등(幼燈)에 현혹된 바 되어 국방을 등한히 하고 민생문제의 해결에 무관심하며 나아가서는 일당의 의사에 사변(事變)되는 바 되었다고 양심적 정치통의 염려를 사고 있어 정부는 물론 국회의 자가비판이 요청되고 있다.<ref name=":25" /> 일반 지식층에서는 국회는 정권을 농단하는 정권쟁탈전의 기관이 아니오, 인민의 의사를 대표하여 인민생활의 향상 해결을 기도하여야만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민주당|한민당]]의 무궤도적 정치행동에 전단된 감이 농후한 것은 일대 민족적 유감사라는 견해를 표시함으로써 국회의 맹성을 촉구하고 있다. (후략)"<ref name=":25" />
 
=== 해체 후 민주국민당 결성 (1949) ===
[[1949년]] [[1월 26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이 각각 해체 후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을 통합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ref name=":2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0_1949_01_26_0050|제목=大韓國民黨과 韓國民主黨, 民主國民黨으로 합당할 것을 결의하고 공동성명서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49년]] [[2월 10일]]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이 정식 출범하였다.<ref name=":22" /> 이 과정에서 이유선(李裕善)·송진백(宋鎭百)·최헌길(崔獻吉)·황호현(黃虎鉉)·최규옥(崔圭鈺)·이요한(李要漢)·진헌식(陳憲植)·박준(朴峻) 등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 소속 국회의원 23명이 한국민주당과의 합당을 반대하고 탈당하는 진통이 있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0_1949_01_26_0030|제목=大韓國民黨 소속 국회의원 23명, 韓國民主黨과의 합당을 반대하고 탈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은 [[1955년]]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 농지개혁법과 이승만 세력과의 결별 (1949) ===
[[1949년]] [[6월 21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는 농민들의 농지 및 토지개혁에 대한 목소리에 부응하여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농지개혁법]]은 한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전라도 친일지주층을 한 방에 박살낼 결전병기였다. 1948년 내각 구성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천거를 무시했던 일에 더하여 [[농지개혁법]] 제정으로 인해 친이승만이던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의 정치노선은 반이승만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한도숙]]에 의하면 [[농지개혁법]]이 농지에만 한정되고 임야 등은 제외된다는 점을 악용, 바닷가 논을 염전으로 바꿔 농지개혁 대상에서 벗어나는 행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짓을 벌인 사람이 바로 한민당 당수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였다고 하였다.<ref name=":6" />
 
== 평가 ==
 
=== 정부 수립 전 친이승만이었다가 정부 수립 후 반이승만화 ===
당리당략과 이해타산에 의한 것이었지만, 대체로 [[광복절|해방]] 이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까지 [[이승만]]의 주장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 기득권을 차지한 다음부턴 [[이승만]]의 [[대통령 책임제|대통령책임제]]를 타도하고 국회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내각책임제]]를 관철하려는 등 [[이승만]]의 가장 적대적인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 반공주의 정당 ===
반공주의 기치가 높이지던 당시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반공주의를 외친 정당이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0_1949_01_01_0200|제목=한국사데이터베이스|성=|이름=|날짜=1949-01-01|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ref>
 
[[한국민주당]]·[[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의 지도층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은 [[제주 4·3 사건|제주 4.3 사건]] 당시 [[김익렬]]의 '귀순작전'에 반대하고 '강경진압'에 앞장서기도 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198378|제목="대한민국 위해 제주 섬 불태워야" '조병옥 흉상' 건립 논란|성=|이름=|날짜=2017-12-19|웹사이트=|출판사=제주의소리}}</ref>
 
=== 친일파 정당 ===
한국민주당은 그 구성원이 모두 [[친일파]]는 아니었으나, [[친일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측면이 있었다. 한민당을 창립한 [[장덕수]]·[[김성수 (언론인)|김성수]]부터가 [[친일파|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자타공인 친일파 정당이었다.<ref name=":4" /><ref name=":9" /><ref name=":1" /><ref name=":3" /><ref name=":2" /><ref name=":23" /><ref name=":24" /><ref name="hojong102" /><ref name="leeahans" />
 
[[1945년]] [[11월]]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민주당을 친일적이고 반동적이며 반역적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하였다. (Political Trends #2, 26 Oct. 1945, p.2.)<ref name=":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husa_002r_0010_0020|제목=주한미군사 2 > 2부. 1장. 한국의 정치와 사람들, 첫 6개월 > 2. 공산당|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통해 공산당의 참여를 시도하였으나 공산당원들은 이를 꺼려하였다. [[박헌영]]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집행부가 한국민주당과 국민당의 반동적이고 친일적인 인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승만]]이 그러한 인사들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하자 공산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하였다. (USAFIK G-2, Periodic Report #34, 3 Nov. 1945, p.3.)<ref name=":4" />
 
[[1947년]] 미군정이 적산(敵産)을 현금 일시지불 원칙에 의해 불하한다는 결정을 내자 각계에서는 '[[일본 제국]]에 협조해서 부를 확보해두지 않은 이상 누구도 적산을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한민당은 현금 일시지불 불하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태도가 한민당을 ‘친일파 정당’, ‘지주와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여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ref name=":9">{{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30_0020|제목=國史館論叢 第58輯 >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Ⅱ. 해방 직후 한국민주당내 주류세력과 그 특징 > 2. 정치노선과 활동|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국제신문]] [[1948년]] [[8월 19일]]자에는 "동 법안([[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실시하게 된다면 실질상 약간의 타격을 면치 못할 한민당"이라고 기술되었다.<ref name=":1" />
 
[[1948년]] [[8월 23일]] 한국민주당의 당수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을 강경히 주장하는 의원들에게 회견을 청하여 친일파 문제를 광범하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범위를 좁게 취급할 것을 요청했다.<ref name=":3" /><ref name=":2" />
 
[[1948년]] [[8월 26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자 한국민주당에 매월 20만 원 정도를 제공하던 친일재벌 金모씨는 돌연 동 법안을 완화 또는 무능화하도록 공작하는 자금으로서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한국민주당에 제공하였다.<ref name=":3" />
 
[[1952년]] [[3월 21일]] [[프란체스카 도너|프란체스카]]가 올리버에게 보낸 서한에는 "[[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친일적이고 그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손실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ref name=":23">{{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24_1952_03_21_0030|제목=프란체스카, 올리버에게 장면에 관한 서한 전달|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52년]] [[10월 13일]] [[조병옥]]은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 최고위원이었던 [[지청천]]이 탈당을 하면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소굴인 [[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을 급히 탈당하라고 [[신익희]]에게 권했다'고 하였다.<ref name=":24">{{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27_1952_10_13_0040|제목=민주국민당, 전국대의원 대회 개최|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민당에서 탈당한 [[윤치영]]은 한민당이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하였다.
 
반면 한민당 창당멤버의 한 사람인 [[허정]]은 일부 친일파의 수용을 인정하였지만 나름대로 엄선 기준이 있었다 한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일제 하에서 고급 관리를 지냈거나 친일파로 지목받던 사람들이 몇 사람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극악한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ref name="hojong102">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 1979) 102페이지</ref>
 
[[2004년]]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는 당시 친일파 논쟁이 격화되자, [[한나라당]]을 친일파로 공격하는 일부 좌파 진영의 주장에 대해 "진보진영에서는 늘상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감싸안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승만]]이 감싸안았다는 [[친일파]]의 실체가 묘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분명했습니다. 한민당이었죠. 이승만이 건국과정에서 한민당과 함께 했고 건국이후에는 한민당을 내팽겨친 것은 알고계시겠죠. 그 한민당이 [[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민주당]]됐고 [[박정희]] 때 [[신민당 (1967년)|신민당]] 됐다고 거기서 쪼개져 [[김영삼]], [[김대중]]이 나왔다는거 아시죠"라면서 역으로 반박을 가하기도 했다.<ref name="leeahans">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83페이지</ref>
 
=== 호남지역주의 정당 ===
한국민주당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태동하였다. [[전라남도]]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광활한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대지주들이 많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보다 일찍 한민당 지부가 결성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초 [[광주광역시|광주]]에서 한민당 지부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김양수 (1896년)|김양수]](순천), [[서민호]](별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ref name=":8" /> 그러나 한민당에 참여한 인물들이 외국유학파와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의 [[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 [[경성방직]] 관련자들 그리고 자본가들이었기 때문에,<ref name=":9" /><ref name=":10">{{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kn_058_0040_0030_0010|제목=1. 일제하 기독교 조직, 동아일보 관계자들|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한민당은 [[이승만]]이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을 봉대하지 않고서는 당세를 확장시킬만한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한민당 총재 취임을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이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을 구상하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다. 또한 한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이 귀국하기 전에 이미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1차로 900만원을 만들어 이를 정치자금으로 사용하도록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에 전달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임정]]은 친일파 정당이라고 비난받는 한민당으로부터의 후원을 거절하였다. 따라서 한민당은 당 활동의 구심점을 마련할 수 없었다.<ref name=":8" /> 요컨대 한민당에 참여한 인사들이 모두 [[전라도]] 출신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세가 전라도에 고착되어 호남지역주의 정당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한민당의 주요 인사는 '''[[김성수 (언론인)|김성수]](전북고창, 동아일보)''', [[김병로]](전북고창, 탈당), [[백관수]](전북고창, 탈당), '''[[나용균]](전북정읍)''', '''[[이석주]](李錫柱, 전북전주)''', '''[[송진우 (1890년)|송진우]](전남담양, 동아일보)''', '''[[정광호 (1897년)|정광호]](전남광주)''', '''[[홍성하]](전남광산)''', '''[[백남훈]](전남담양)''', '''[[김준연]](전남영암)''', '''[[이철승]](전북전주)''', '''[[김용무]](전남무안)''', '''[[김양수 (1896년)|김양수]](전남순천)''', '''[[서민호]](전남고흥)''' 외에도, '''[[장덕수]](황해남도, 동아일보)''', '''[[함상훈]](황해남도, 동아일보)''', '''[[백낙준]](평안북도)''', [[원세훈 (1887년)|원세훈]](서울, 탈당), [[이기붕]](서울, 탈당), '''[[김도연 (정치인)|김도연]](서울)''', '''[[구자옥]](경기광주)''', [[임영신]](충남금산, 탈당), '''[[유진산]](충남금산)''', '''[[윤보선]](충남아산)''', '''[[유진희]](충남예산)''', [[윤치영]](충남아산, 탈당), '''[[조병옥]](충남천안)''', '''[[장택상]](경북칠곡)''', '''[[조헌영]](경북영양)''', [[송남헌]](경북문경, 탈당), '''[[이활 (1899년)|이활]](경북영천)''', '''[[서상일]](대구)''', '''[[이인]](대구)''', '''[[최윤동]](대구)''', '''[[김재학 (정치인)|김재학]](金載學, 경남통영)''', [[김효석 (1893년)|김효석]](경남합천, 탈당), '''[[이길용 (언론인)|이길용]](李吉用, 경남마산, 동아일보)''', [[허정]](부산, 탈당), [[김약수]](부산, 탈당) 등이 있었다.<ref name=":10" />
 
[[1948년]] [[7월 30일]] 한민당에 이승만파와 호남파 간의 갈등이 있었는데,<ref name=":7" /> 이는 결국 [[1948년]] [[8월 2일]] [[윤치영]]의 한국민주당을 탈당과 [[8월 3일]] [[정현모]] 등 9명의 국회의원의 탈당으로 이어졌다.<ref name=":5" />
 
[[1950년]] [[4월 29일]] 각 당·단체 대표 좌담회에서 [[경향신문]] 소속 사회자는 [[구자흥]]에게 "세상에서는 [[전라도]]가 [[민주국민당 (1949년)|민국당]]의 금성탕지(金城蕩地, 쇠로 만든 성과, 그 둘레에 파 놓은 뜨거운 물로 가득 찬 못이라는 뜻으로, 방어 시설이 잘되어 있는 성을 이르는 말)라고들 하는데 이 점 구선생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말했다.<ref name=":16">{{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7_1950_04_29_0010|제목=<5·30 총선거를 어떻게 싸우나:각 당·단체 대표 좌담회>|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1950년]] [[5월 27일]] [[존 무초]] 주한미국대사는 [[전라도]]를 "[[민주국민당 (1949년)|민주국민당]]의 요새"라고 표현하였다.<ref name=":17">{{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17_1950_05_27_0030|제목=무쵸 주한미국대사, 미 국무부장관에게 5·30 총선거 진행상황을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다만 [[허정]]은 한민당을 가리켜 전라도 당, 호남 갑부의 정당이니 친일파의 소굴이니 하고 비난하는 것은 공산당의 악의의 찬 비난에 지나지 않았다고 반박하였다.<ref name="heojong109" /> [[조병옥]]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나 [[김성수 (언론인)|김성수]]는 정당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나 또는 당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지방적인 차별을 두지 않고 인재 본위 실력 본위로 사람을 등용하였으며 특히 정당 및 사회단체 조직에 있어서는 그런 점에 가장 유의하고 세심한 검토로서 전력을 다하여 주력하였던 것이다'며 지역 정당이 아니라고 반박하였다.<ref>조병옥, 《나의 회고록》 (도서출판 해동, 1986) 181페이지</ref>
 
== 논란 및 의혹 ==
=== 계보 논란 ===
작가 [[장정일]]은 2004년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결실"이라는 주장을 풍자했다. 그에 의하면 '44년 만의 진보정당의 국회 등원을 '50년 만의 결실'이라고 부정확하게 반올림하는 것 만큼이나 진보정당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무지는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운명을 놓고 '50년 전통의 야당'이라는 가당치도 않은 수사가 분분했던 것과 동전의 양면<ref>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4년 6월호》 (인물과 사상사, 2004) 74페이지</ref>'이라는 것이다.
 
[[장정일]]은 또, [[2004년]] 4.15 총선을 전후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쇠멸하는 진로를 놓고 '50년 역사의 전통 야당'을 지켜 달라고 읍소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꽤 있다. 하지만 새천년 민주당의 50년 전통 운운은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의 50년 만의 진보정당 의회 진출이라는 환희에 찬 구호와 달리 사기성이 짙은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새천년민주당의 기원을 1990년 1월 22일에 행해진 [[김영삼]]의 3당합당에서부터 찾지 않고 한민당, 민국당, 신한당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고자 한다면 안티조선 논객을 자청했던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 등의 비아냥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ref name="leeahans" />
 
== 역대 당원 ==
{{참고|분류:한국민주당 당원}}
 
== 역대 총선 결과 ==
줄 303 ⟶ 349:
* 한배호, 《한국현대정치론》 (오름, 2000)
{{참고 자료 끝}}
 
== 외부 링크 ==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4h2659b 한국민주당]{{깨진 링크|url=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24h2659b }}
*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5987&v=42 한국민주당]{{깨진 링크|url=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s=K&i=245987&v=42 }}
 
{{대한민국 우익}}
줄 324 ⟶ 366:
[[분류:장덕수]]
[[분류:윤치영]]
[[분류:민주당 (대한민국)|*]]
[[분류:대한민국의 보수주의]]
[[분류:대한민국의 자유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