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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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나라 그림|Flag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svg}} [[남조선국방경비대|국방경비대]]<br />
*{{국기그림|대한민국|1948}} [[여수경찰서|여수]]·[[순천경찰서|순천]] 경찰
|교전국2 = {{국기그림|대한민국 국군}} 14연대
|지휘관1 = [[이승만]]<br />[[송호성]]<br/>[[원용덕]]<br/>[[김백일]]<br/>[[백선엽]]<br/>[[정일권]]<br/>[[백인엽]]<br/>[[송석하 (1915년)|송석하]]<br/>[[김창룡]]
|지휘관2 = [[홍순석 (군인)|홍순석]]{{KIA}}<br />[[김지회]]{{KIA}}<br />[[지창수 (군인)|지창수]]{{K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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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
'''여수·순천 사건'''(麗水順天事件) 또는 '''여순사건'''(麗順事件)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0월 27일]]까지 [[전라남도]] [[여수시|여수]]·[[순천시 (전라남도)|순천]] 지역에서 [[대한민국 국군|국군]] 제14연대 소속이자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소속의 좌익 군인인 [[김지회]]·[[지창수]]가 주동하여 일어난 군사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이 가담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국군|국군]], [[대한민국 해군|해군]], [[대한민국의 경찰|경찰]]에 의해 반란군 2,000여 명이 전멸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라남도]] 동부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2009년]]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결정한 여순사건 당시 순천 일대의 민간인 희생자는 439명이고,<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3&aid=0002468562&sid1=001|제목="여순사건 때 순천 민간인 439명 희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뉴시스}}</ref> [[2010년]]에 결정한 여수 일대의 민간인 희생자는 124명이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4699628&sid1=001|제목="여수지역 여순사건 희생자 124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ref> 단 일부 시민단체는 민간인 희생자가 10,000여 명이라고 보고 있다.<ref>{{웹 인용|url=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2&aid=0001981349|제목=[사설]여순사건 60년에 위령탑 하나 없으니|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경향신문|확인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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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
=== 배경 ===
 
====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반란 배경 ====
제14연대는 [[1946년]] [[2월 15일]] [[광주광역시|광주]]에서 편성된 제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金知會), 홍순석(洪淳錫)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3기생으로 이 기수는 80%가 넘는 인원이 사병 및 민간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좌파적 경향을 띠는 인물들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는 당시의 간부 모집 주체였던 미군정이 인력 충원에 집중하고자 간부후보생들의 이념적 성향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ref name=":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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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단독 정부 수립이 확정되고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투쟁이 점차 급진·폭력화되면서 이 지역의 단독 정부 반대 움직임은 대중적 운동보다는 점차 소수 인원에 의한 급진적 투쟁의 형태로 변모되어 갔다.<ref name=":3" /> [[9월 9일]]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9월 14일]] 중앙청·독립문 등 시내 여러 곳과<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14_0200|제목=중앙청·독립문 등 시내 여러 곳에 人共旗 게양사건 발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9월 29일]] 경상북도 각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인공기]] 게양사건을 일으켰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29_0030|제목=경상북도 각지에 인공기 게양사건 발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0월 5일]] 38선에서 남북 간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05_0010|제목=38선 분규, 38선 부근 장단에서 북한 보안대원과 남한 경찰 사이에 대규모 충돌 발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발단 ====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시|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대한민국 국군|국군]] 제14연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제14연대는 [[제주 4·3 사건|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김지회]]와 [[지창수 (군인)|지창수]]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 경과 ===
이 경과에 나온 기록은 여수에서 벌어진 참상을 그 참상을 주도한 자들이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닌, 반란군이 한 일로 기록하려고 한 바를 보여주는 경위이다. 실제로 일어난 경위에 대해서 중앙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기록을 조작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진상을 아직 알지 못하며, 이 때문에 2020년까지도 진상을 조사하는 특별위를 제정해달라는 법이 계속해서 상정 중이다.
* [[1948년]] [[10월 19일]]
** [[전라남도]] [[여수시|여수]]에 주둔 중이던 [[대한민국 국군|국군]]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제주도제주 지역을4.3 사건]] 진압하라는투입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였다.<ref name=":2" />
* [[1948년]] [[10월 20일]]
** 02시 00분, 제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켰다.<ref name=":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19_0070|제목=李範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여순사건 경위와 성격을 설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10시 00분, 반란군에게 여수를 빼앗겼다. 반란군은 지방 공산주의 청년들과 합친 후 무기를 나눠주고 민중을 선동하며 양민을 살해하였다. 일부 철도를 점령한 다음 순천 방향 학생통학열차 6개 차량을 타고 순천을 향하여 돌진하였다.<ref name=":2" />
** 17시 00분, 순천을 빼앗겼다.<ref name=":2" />
* [[1948년]] [[10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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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시 30분, 보성, 13시 50분 벌교, 17시 20분 광양을 각각 완전 탈환하였다.<ref name=":1" /> 반란군 약 1,000명이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피하기 시작했다.<ref name=":1" />
* [[1948년]] [[10월 25일]]
** 여수·순천에 [[계엄]]이 선포되었다. "여수군 및 순천군에서 발생한 군민 일부의군민일부의 반란을 진정하기 위하여 동지구를 합위지경으로 정하고 본령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ref>{{웹 인용|url=http://www.law.go.kr/법령/계엄선포에관한건/(00013,19481025)|제목=계엄선포에관한건 [시행 1948. 10. 25.] [대통령령 제13호, 1948. 10. 25., 제정]|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국가법령정보센터|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25_0050|제목=여순사건, <대통령령 제13호, 계엄선포에 관한 건>|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 10시 00분, 고흥을 완전 탈환하였다.<ref name=":1" />
** 진압군의 여수 시내에 대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시가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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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우 연루설 ===
[[1948년]] [[9월 23일]] [[이승만]] 대통령,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외 정계요인 다수 참석리에 38선의 장벽의 장해와 사상적 혼란이 격심한 때 공산주의 사상을 배격하자는 겨레들이 운집한 가운데 '반공구국 총궐기 정권이양 대축하 국민대회'가 거행되었다. [[이승만]], [[이범석 (1900년)|이범석]], [[이시영 (1868년)|이시영]] 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김병로]] 대법원장 등의 치사가 있었고, 이종형(李鍾滎)씨로부터 “우리는 38선을 기필코 철폐하자”는 격려사에 이어 별항과 같은 결의문을 통과시키고 국회에 보내는 메시지 낭독과 악질공산분자·악질모리분자·악질친일분자를 처단하라는 건의안을 통과시킨후 만세삼창으로 오후 2시경 폐회하였다. 이날 행사에 대해 자유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지난 23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반공구국·정부이양대축하국민대회는 해방후 초유의 성사를 이룩한 것은 백만 시민의 애국애족 열념의 발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좌익매국분자들의 간특한 모략선전과 흉악한 [[한국민주당|한민당]] 반동분자들의 괴이한 책동으로 항간에는 구구한 流言이 돌고 있으나, 이것은 그들의 야비스러운 정권욕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애국동포는 그런 비열한 음모에 요동될 리 만만 없겠지마는 당일 대회장 이종형선생의 격려사 녹음판을 속기하여 동포들의 애국양심에 호소하는 동시 궁금증을 가진 동포들을 위로코자 하는 바이다(문책기자)."<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9_23_0060|제목=반공구국총궐기정권이양대축하국민대회의 진행 개최|성=|이름=|날짜=1948-09-23|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출판사=|확인날짜=}}</ref>
여순 사건 직후, 이승만 정부는 극우 세력<ref>당시에는 '극우'가 오늘날처럼 [[반공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자]], 즉 [[김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ref> 일부가 이 반란에 동조했다는 주장을 유포하고, 내무부는 경찰국에 수사를 지시하였다.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10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정권욕에 눈이 먼 몰락 극우정객이 [[공산당]]과 결탁해 벌인 정치적 음모"라며 사실상 김구를 지목했다.<ref name="여순1">[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볼록거울> 국가보안법 제정 60돌]{{깨진 링크|url=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 연합뉴스 2008년 8월 29일자</ref>
 
[[1948년]] [[10월 21일]]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은 [[여수·순천 사건]]의 경위와 성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하고 반국가적 반란군을 책동하여 일으킬 책동을 하였다.''' 불행히도 군정이양전이 되어서 그 가운데 그 중 [[오동기]](吳東起)란 자가 가장 교묘한 방법으로 소령으로 승진하여 여수연대장에 취임하였다. 이 자는 여수에 가서 소위 하사관 훈련의 기회를 포착하여 단순한 하사관들을 선동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극우진영인 해외와 국내의 정객들과 직접 간접으로 연락하여 가지고 러시아 [[10월 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기습 반란을 책동하였다."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私利)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ref name=":2">{{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19_0070|제목=李範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여순사건 경위와 성격을 설명|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인용문|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ref name="여순2">[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7042&PAGE_CD= 김구, 여순반란 '수괴' 될 뻔했다 - 오마이뉴스] 2001년 10월 26일자</ref>|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 기사)}}
 
[[1948년]] [[10월 27일]] [[여수·순천 사건]] 진압 직후 김구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하였다.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금번 반란을 우려하고 있다.''' (중략) 현재까지의 당국 발표에 의하면 반란무리의 목적은 북한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후략)"<ref name=":12">{{웹 인용|url=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781219481028m1017&set_date=19481028&page_no=1|제목=극우관여운(極右關與云)은이해난(理解難)|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조선일보|확인날짜=}}</ref>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 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하고,<ref name="여순2"/><ref name="soul481022">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자</ref>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지목했다.<ref name="soul481022"/>
 
한편,같은 한국민주당은날 [[한국민주당]]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nowiki/>'금번 반란의 주요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신신훈련(神神訓練)의 결핍에 있다''''고 논하였다.<ref name=":12" />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면서 '극우정객'을 재차 언급하였다.<ref name="여순2"/> 같은 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같은 해 10월 1일 발생했던 '혁명 의용군 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자기를 여순사건의 배후에 있는 극우파로 지목하자 김구는 분개하였다.
 
[[1948년]]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은 "전남지구 반란사건 배후관계에 관하여 전번 李국무총리는 극우진영과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이번 반란사건에 있어서 국무총리로부터 일부 극우분자와 좌익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는 좌익계열이라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극우분자라고 한 데 대해서는 국무총리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줄로 믿는다"'''라고 답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29_0070|제목=李承晩 대통령, 민병 5만 명 조직계획 및 공무원 최저생활보장 문제 등에 대해 기자와 문답|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0월 27일]], 김구는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박하였고, 그의 반박문이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ref name="여순1"/>
 
[[1948년]] [[10월 30일]] [[김구]]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30_0020|제목=金九, 여순사건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인용문|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극우라는 용어에 관하여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 기사)}}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한국민주당]] [[정광호]](鄭光好)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민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했다.<ref>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ref>
한편, 한국민주당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금번 반란의 주요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신신훈련(神神訓練)의 결핍에 있다'고 논하였다.
 
[[1948년]] [[12월 8일]] [[이범석 (1900년)|이범석]] 국무총리는 여순사건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의 세포가 부대 내에 침투한 것, 2. 제주도에 출동시 제14연대내 좌익 세포에게 당 지령이 있는 것, 3. 지방인 좌익 청년단체 급 학교 내에 좌익 세포망이 군세포망에 속계(速繫)된 것, '''4. [[오동기]](吳東起) 소령 체포로 말미암아 극우극좌의 합작음모가 폭로한 것'''"<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2_08_0190|제목=제1회 124차 국회본회의에서 李範奭 국무총리, ‘1948년 4월 이후 국내 소란사건’에 대하여 종합 보고|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급히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회의원]] [[정광호]]는 극우가 참가했다는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의 발표 때문에 민심이 나쁘다며 극우가 참가했다는 발표에는 정정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극우가 참가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계속 주장했다.<ref>국회속기록 제1회 90호 (대한민국 국회, 1948) 678~679</ref>
 
== 기타 일화 ==
[[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 '반도(叛徒,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ref>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자</ref> [[10월 30일]] 담화에서는 여수, 순천 등지의 반란을 '집단 테러 활동'으로 규정하고, "부녀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쳐지지 않을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ref>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ref>
 
=== 경무대 폭파 음모 사건 ===
{{인용문|우리는 일찍부터 폭력으로써 살인·방화·약탈 등 테러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자고 주장하였다. 금번 여수·순천 등지의 반란은 대규모적 집단테러 행동인 바, 부녀 유아까지 참살하였다는 보도를 들을 때에 그 야만적 소행에 몸서리 처지지 아니할 수 없다. 멀리서 듣고도 그러하니 현지에서 목격하는 자는 비참 격앙함이 그 극에 달할 것이다. 남과 남의 부모처자를 살해하면, 남도 나의 부모처자를 살해하기 쉬우니 그 결과는 첫째, 우리 동족이 수없이 죽을 것이오 둘째, 외군에게 계속 주둔하는 구실을 줄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주독립을 좀먹는 행동이니 이로써 우리는 망국노의 치욕을 면하는 날이 없을 것이니, 반란을 일으킨 군인과 군중은 이 때에 있어서 마땅히 여동(勵動)된 감정을 억제하고 재삼숙고하여 용감히 회오(悔悟)하고 정궤(正軌)로 돌아갈 것이어니와 현명한 동포들도 마땅히 객관적 입장에서 그 반란을 냉정히 비판하면서 이것의 만연을 공동방지할지언정 허무한 유언에 유혹되거나 혹은 이에 부화뇌동하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된 [[1948년]] [[10월 19일]] [[경무대]] 폭파 음모 사건이 발생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오전 2시경 효자동 전차 종점 근방에서 정체모를 전기줄을 발견하여 근방을 조사해본 결과 약 70미터 가량의 땅굴과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 6통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10_19_0060|제목=수도경찰청, 景武臺 폭파음모를 사전에 적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1948년]] [[11월 8일]] 수도관구 경찰청장 김태선은 [[청와대|경무대]] 앞에 폭발탄을 매장하여 이승만을 암살하려던 박춘석(朴春錫)과 공범 김상기, 정우섭, 황보원(皇甫源), 황보경순(皇甫景淳)의 암살음모사건 전모를 발표하였다. 박춘석 등 5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는 미명하에 [[이영 (1889년)|이영]]으로부터 좌익정당 가담, 이승만과 정부 및 정계 요인 암살, [[대한민국 정부]] 전복,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방해하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8월부터 10월 17일까지 경무대 앞과 [[장택상]] 사택 앞에 폭탄을 매장하고 [[여수·순천 사건]]에 호응하여 이승만과 정부 및 정계 요인을 일시에 암살하려던 것이었다.<ref>{{웹 인용|url=http://db.history.go.kr/id/dh_009_1948_11_08_0020|제목=金泰善 수도경찰청장, 대통령 암살음모사건 전모를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한국사데이터베이스|확인날짜=}}</ref>
여러분의 기대와 탁부(託付)와 애국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는 나로서 무슨 면목으로 여러분께 왈가왈부를 말하랴마는 금번 반란이 너무도 중대하므로 인하여 국가 민족에 미치는 손해가 또한 중대한 까닭에 그대로 함구만 할 수 없어서 피눈물로써 이와 같이 하소연하는 바이다.
 
동지 동포는 우리의 고충을 깊이 양해하고 동족상잔에서 동족상애의 길로 공동매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서울신문 (1948년 10월 30일 기사)}}
 
== 기타 일화 ==
=== 부대명 재편 ===
여수·순천 사건 이후 서수(序數) '4'는 [[대한민국 국군]]의 독립 부대명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 14연대는 없어졌고, 4연대는 20연대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