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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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비 간택 ====
1866년 어린 민자영은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된다. 민자영이 간택되어 왕비가 되는 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 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ref>[[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태백산본(규13153), 정족산본(규13155), 예조본(규13156), 규13157, 규15078 등 총 5책이 소장되어 있다.</ref>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우선 [[1866년]] [[2월 15일]]([[음력 1월 1일]]) [[신정왕후 (조선)|대왕대비 조씨]]가 조선에 있는 12세 ~ 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린다.<ref name="한22"/> 그리고 [[음력 2월 25일]] 초간택을 행하였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8%81%EC%A1%B0&keyword=%EC%98%81%EC%A1%B0 중희당에서 초간택을 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2월 25일(을묘) 7번째 기사에서.</ref>,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더불어 재간택에 들어갔다.<ref name="한22"/><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8%81%EC%A1%B0&keyword=%EC%98%81%EC%A1%B0 민치록의 딸, 김우근의 딸 등을 재간택에 들어오도록 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2월 25일(을묘) 8번째 기사에서.</ref><ref name="한24">한영우, 24쪽 ~ 27쪽에서.</ref> 왕비로 정해진 때는 3월 6일의 삼간택에 뽑힐 때였으며, [[3월 21일]] 남편이 될 고종이 운현궁에서 명성황후를 데리고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했다.<ref name="한24"/><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B9%9C%EC%98%81&keyword=%EC%B9%9C%EC%98%81 별궁에 나아가 친영례를 행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3권, 3년(1866 병인 / 청 동치(同治) 5년) 3월 21일(경진) 1번째 기사에서.</ref> 아버지 민치록은 왕의 장인에게 추증하는 예에 따라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본부인 해주오씨는 해령부부인에 추증되었으며, 생모 감고당 한산이씨는 한창부부인의 작위를 받았다.<ref name="한24"/><ref>지두환, 241쪽</ref>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여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씨]] [[김병학]]의 딸,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 묵계를 체결했으나, 약속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왕비는 그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씨 일가와 힘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