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성공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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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육의 시작 ===
[[1910년]] 대한성공회 2대 [[주교]]인 [[아더 터너]] 주교가 [[과로사|과로로 별세]]하자, [[마크 트롤로프]] 주교가 대한성공회 3대 주교가 되었다. 트롤로프 주교는 한국인 [[성공회]] [[사제]]를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여, [[1914년]] [[강화도]]에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인 '''성 미가엘신학원미가엘 신학원'''을 세웠고(<ref>성공회가 우리나라에한국에 들어온 1890년 당시 수호성인이 성 미가엘과 모든 천사들이었다. 지금도 성공회 내동교회 수호성인이 성 미가엘과 모든 천사들이다.)</ref>, [[1915년]] 김희준(마가)사제가 대한성공회 3대주교인 마크 트롤로프(한국이름 [[복음사가 마르코|마가]])주교에게 [[성품성사|서품]]을 받음으로써 처음 한국인 성공회 사제가 되었다.<ref>《성공회의 역사》/성공회 교육훈련원p.114</ref>김희준 마가 신부의 [[손자]]인 김진세(모세)신부도 성공회 사제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외 세실 주교가 복음화운동으로싸 선교사로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성공회 신자가 만 명, 축성한 성공회 성당이 만여 개에 달할 정도로 성공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 수도원의 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