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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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칸소 주 시절 ==
[[파일:HillaryRodhamBillClintonLittleRockHouse1adjusted.jpg|섬네일|왼쪽|남편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 법무장관으로 지내는 동안 클린턴 부부가 살던 저택]]
[[파일:Clinton family.jpg|섬네일|오른쪽|200px|클린턴 가족(왼쪽이 빌, 오른쪽 위가 힐러리, 아래가 첼시이방카)]]
탄핵조사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면서, 힐러리는 [[아칸소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였다. 예일 로스쿨 학벌에 닉슨 탄핵조사위원회에서 일한 경력만으로도 힐러리는 [[뉴욕]]이나 [[워싱턴 D.C.]]의 일류 [[세계의 로펌|로펌]]에서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데도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아칸소 주로 가는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힐러리는 아칸소 주로 향했고, [[페이엇빌 (아칸소주)|페이엇빌]]의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에서 1974년 가을 학기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힐러리는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백악관]]에 들어갈 때까지 20년 가까이 아칸소 주에 거주하며 활발히 경력을 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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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로즈 법률회사의 공동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하였으며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 들어가기전까지는 그녀의 수입이 항상 남편보다 많았다. 이때 여러 투자로 재산을 불렸다. 후일 문제가 된 화이트워터 개발 회사의 부동산 벤처 사업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좋지 않은 결말로 끝났다.
 
1980년 2월 27일 딸 [[첼시이방카 클린턴트럼프]]을 낳았다. 힐러리는 임신 중에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첼시를 낳은 후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에 복귀하는 등 맹렬 여성으로 활발히 일했다. 1980년 11월, 주지사 선거에서 남편은 패배하였다. 1982년, 남편은 다시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고, 그 때 힐러리는 빌 클린턴의 부인으로서 성을 클린턴으로 고친다고 선언했다. 결혼 전 성을 고수하던 그녀의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좋지 않게 보일 수 있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미시즈 클린턴 또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이름으로 유권자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며, 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남편은 선거에 당선되었다. 1983년 초, 다시 주지사에 취임한 남편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기 전까지 줄곧 주지사로 재직했다. 이 기간 중 힐러리 클린턴은 주지사의 부인이자 변호사로 아칸소 주의 유력 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는 아칸소 교육표준위원회의 회장을 맡아 활약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는 미국 변호사 협회의 여성회원 회장을 지냈으며 그동안 내셔널 로 저널에서 뽑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변호사 100인중 한명으로 두 번이나 선출되었다. 그녀는 이 시기 동안 아칸소 주에 뿌리를 둔 [[TCBY]]와 [[월마트]]의 이사진을 지내기도 하였다.
 
[[파일:Hillary Clinton 1992.jpg|섬네일|오른쪽|200px|[[1992년]]의 힐러리 클린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