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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unersdorff.jpg|섬네일|260px|[[쿠너스도르프 전투]](1759년 8월 12일)]]
[[파일:HGM Findenigg Gefecht bei Maxen.jpg|섬네일|260px|[[막센 전투]](1759년 11월 21일)]]
1759년은 프로이센에 있어서 패배로 점철된 한 해였다. 7월 23일, [[카이 전투]](또는 파치그 전투)에서 [[카를 하인리히 폰 베텔]] 장군이 이끄는 26,000명의 프로이센군은 [[표트르 살티코프]] 백작이 이끄는 47,000명의 러시아군에 패배하였다. 8월 1일, [[민덴 전투]]에서 하노버군이 프랑스군 6만 명을 격파했지만, 8월 12일, [[쿠너스도르프 전투]](현 폴란드령 [[쿠노비체]])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끄는 48,000~50,800명의 프로이센군은 59,000명<ref>러시아 기록에 따른 숫자이다. 독일, 미국 역사가들은 64,000~79,000명으로 보고 있다.</ref>의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대패하였다. 이 패배는 러시아군이 이미 [[그로스예거스도르프 전투]](1757년 8월 30일)나 [[조른도르프 전투]](1758년 8월 25일)에서 명성을 떨쳤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러시아군을 우습게 본 것과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잘 연계한 데 원인이 있었다.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9만 명<ref>프리드리히 2세가 추산한 숫자이다.</ref>의 병력을 이끌고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향하여 진군해 왔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가 남긴 기록에는 '우리는 적과 싸울 것이다 - 적을 이길 희망보다는 우리 도시의 벽 아래에서 죽는 것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그는 베를린에 남은 병력 33,000명을 긁어 모아 연합군과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프로이센이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에 처한 이때, 프리드리히 2세가 직접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Miracle of the House of Brandenburg)이라고 명명한 기적이 일어났다. 9월, 베를린에 도착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돌연 철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연합군도 쿠너스도르프 전투에서 2만 명의 병력을 잃는 등 피해가 막심했고, 전직적진 깊숙히 들어온 나머지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프리드리히 2세의 휘하 장군이자 동복 아우인 하인리히의 군대가 멀쩡히 남아있어 큰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11월 21일 벌어진 [[막센 전투]]에서는 14,000명의 프로이센군이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다운 장군]]이 이끄는 34,000명의 오스트리아군에 대패하여 2,000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11,741명이 포로로 잡혔다.
 
[[파일:Bataille des Cardinaux en 1759 peinte par Richard Paton.jpg|섬네일|260px|[[키브롱 만 해전]](1759년 1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