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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는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원 거주민들이 고조선의 유민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발굴되는 유물의 양상도 [[고조선]] 계통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한(辰韓)은 고조선 계통의 종족으로 이해되고 있다. 진한의 12국은 진왕(辰王)에게 소속되어 있었는데, 진왕(辰王)은 마한 사람이 대대로 이어갔다고 한다. 이를 두고 마한의 진왕(辰王)이 진한 12국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고, 진한(辰韓)의 지배자인 진왕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견해<ref>천관우, 〈진·변한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20, 1976</ref> 가 있다.
 
진한은 초기에는 마한의[[마한]]의 통제를 받았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사로국]]의 통제를 받았다. 그 통제는 소극적으로 (i) "신수두"의 건설과 (ii)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i)해마다의 조알(朝謁)과 (ii)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 무렵부터 중국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하는 등 소국 연맹체의 세력이 크게 신장하였다. 이는이후 일반적으로경주의 사로국(후일의 신라)를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속하여복속되며 세력을신라로 성장시킨성장한 것으로 이해된다보인다.
 
한편 5,6세기에 조성된 [[경상북도]] [[의성군|의성]] 지역 고분에서 수발형 장식이 달린 [[백제]]식 금동관모가 출토된적이 있는데, 의성은 진한 소국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금동관모와 함께 경주지역 토기와 다른 의성을 중심으로 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출토되는 '의성양식 토기' 등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 이사금]]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 일대의 진한이 [[신라]]에 의한 ‘멸망’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고 보고 있다.<ref>[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1202.010100736120001 독자적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