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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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는 상반되게 존립한 왕권: 나쁜 왕의 욕심으로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키는 설명으로 임페리얼을 참조로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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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ref>현릉원이라는 표기는 웹상에서 쓰이는 오기이다.</ref> 이라 이름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 명당의 유래 ===
==== 사도세자와는 상반되게 존립한 왕권 ====
{{참조|조선 장조#기타|임페리얼}}
[[고구려]]의 매홀(買忽)군이었던 곳으로<ref name="경상일보석굴암">{{뉴스 인용|url=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357|제목=미인의동굴 <954회>38. 석굴암의 봄(9)|출판사=경상일보|날짜=2009-06-12}}</ref> 당시 고구려인들은 ‘[[성 (건축)|성(城)]]’을 ‘홀(忽)’로 불렀다.<ref>{{뉴스 인용|url=https://shindonga.donga.com/3/all/13/103417/4|제목=언어사적 측면에서 본 고구려어의 뿌리|출판사=신동아|날짜=2004-04-29}}</ref>
[[경덕왕]] 때 수성(水城)군이라고 고쳐 한주(漢州, 지금의 서울)에 소속하게 했다.<ref name="경상일보석굴암"/>
통일 신라 [[혜공왕]] 768년에는 일길찬 김대공이 [[녹읍]]인 수성군의 [[사병]]으로 [[반란|난]]을 일으켜 진압된다.<ref name="경상일보석굴암"/> 대공의 아우 아찬 대렴이 혜공왕의 황음(荒淫)을 어전에서 왕에게 간(諫)하다가 투옥되었기 때문이다.<ref name="경상일보석굴암"/>
 
==== 노론 벽파에 관한 정치적 안배 ====
{{참조|혜공왕#치세|벽파|탕평책}}
혜공왕은 780년에 [[김지정의 난]]이 일어나 살해당한다.
 
== 건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