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Falsenote (토론 | 기여)
소개글 편집
1번째 줄:
{{다른 사람}}
<!-- 인물 정보 틀을 사용하는 게 맞을 듯 -->
{{공직자 정보
|이름= 이수광
|원래 이름 = 李睟光
|정당 = [[남인 세력]]
|출생일= {{출생일|1563|3|14}}
|출생지= [[조선]] [[한성부]]
줄 27 ⟶ 28:
|웹사이트=
}}
'''이수광'''(李睟光, [[1563년]] [[3월 14일]]([[음력 2월 20일]]) ~ [[1629년]] [[1월 19일]](음력 [[1628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 [[저술가]]이다. 왕실 종친의 후손으로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f name="역대">{{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제목=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확인날짜=2008-11-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5131933/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보존날짜=2015-09-25 |url-status=dead }}</ref>
'''이수광'''(李睟光, [[1563년]] [[3월 14일]]([[음력 2월 20일]]) 조선 한성부 출생 ~ [[1629년]] [[1월 19일]](음력 [[1628년]] [[12월 26일]]) 조선 한성부에서 별세.)은 [[조선]] 중기 시대 왕족 후예 출신의 문신이자 [[성리학]]자, [[실학]]자, 외교관이다. 그는 [[조선 선조]] 시절 이조좌랑 등을 거쳐 성균관 전적·함경도 안변부사 등을 지냈다.
 
[[조선 선조|선조]], [[광해군]], [[조선 인조|인조]] 세 임금 밑에서 병조좌랑, 안변부사, 순천부사,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공조참판, 이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내외직을 두루 역임했고, 사신으로 세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관리로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모두 치렀다.
그는 실학의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남인]] 실학 세력의 토대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실학]]을 등장을 이끈 실학의 선구자이며, [[남인]] 실학 세력의 토대가 된 인물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ref name="역대">{{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제목=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확인날짜=2008-11-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5131933/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보존날짜=2015-09-25 |url-status=dead }}</ref> 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f>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2006) 119쪽 {{ISBN|895862096X}}</ref>[[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03쪽 {{ISBN|9788991221284}} <!--“…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중흥을 위한 사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 이 문단은 도입부에 들어가기에 내용이 많고, 뒤의 내용과 중복되므로 줄여서 정리하는 게 좋을 듯 -->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생은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던 백호 [[윤휴]]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며,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이다.<ref name="역대">{{웹 인용 |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제목=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확인날짜=2008-11-1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5131933/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84982&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2005F00410031003500360033005F0031005F0030003000300039003800330031&pName=C774C218AD110028674E775F51490029 |보존날짜=2015-09-25 |url-status=dead }}</ref> 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선진국 중국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안남(安南, 베트남)·유구(琉球, 류큐)·섬라(暹羅, 시암) 사신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이수광에 대한 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유구·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수광이 당대에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ref>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2006) 119쪽 {{ISBN|895862096X}}</ref>[[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증흥을 위한 사회, 경제 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03쪽 {{ISBN|9788991221284}} <!--“… 이수광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고 국가 중흥을 위한 사회,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무엇보다도 실천, 실용의 학문에 힘썼다. 무실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섭렵하고 정리했다. 선현들의 사적을 모으는 한편 이를 현재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지봉’이라는 호를 딴 《지봉유설》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이다.”--></ref>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아들인 [[이민구]](李敏求)의 문하생은 [[남인]]의 거두이자 [[청남]]의 영수였던 백호 [[윤휴]]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신.
 
== 생애 ==
줄 60 ⟶ 64:
1597년(선조 30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그해 [[정유재란]]의 종결을 보았다.
 
1597년(선조 30년) 진위사(陳慰使)<ref>중국 황실에 상고(喪故)가 있을 때 보낸 사신. {{출처|날짜=2011-10-12|어떤 자료}}에는 1597년의 북경행이 "주청사(奏請使)" 자격이었다고 보고 있다.</ref> 로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베트남]]의 [[후 레 왕조]]에서 온 풍극관(馮克寬, [[:vi:Phùng Khắc Khoan|Phùng Khắc Khoan]])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만났고,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50일 동안 함께 머물렀다. 두 사람은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 받았다. 고국에베트남으로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 조완벽의 일대기를 다루었다기록했다.<ref>신병주《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책과함께(2007) 310쪽 {{ISBN|9788991221284}} <!--“1597년 진위사로 명나라 북경에 간 이수광은 안남(지금의 베트남)에서 온 풍극관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두 사람은 숙소인 옥화관에서 50일이나 함께 머물렀다. 한자로 필담을 주고받으며,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풍속을 이야기하고, 시를 주고받았다. 고국에 돌아간 풍극관은 관리와 유생들에게 이수광의 시를 소개했다. 조선 학자의 지성에 깊이 감명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사실은 조완벽이라는 인물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조완벽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일본 상인에 팔려 안남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람이다. 안남에서 조완벽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수광과 같은 조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안남에서는 조완벽을 초대하여 이수광의 시를 보여주고 이수광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조선에 돌아온 조완벽은 이 사실을 알렸고 나중에는 이수광에게까지 그 소문이 전해졌다. 이수광은 〈조완벽전〉을 저술하여 자신과 풍극관의 인연을 밝혔다.”--></ref>
 
1605년 외직인 [[안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606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07년 다시 홍주목사에 임명되어 부임했다. [[선조]]의 사후 1609년(광해군 1)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도승지]]<ref>승정원 승지들의 우두머리로 국왕의 비서실장격</ref>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승지]]로 발탁된 뒤, [[대사헌]], [[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고 [[대사간]] 등을 지냈다.
줄 70 ⟶ 74:
=== 생애 후반 ===
{{참고|인조 반정}}
1613년 계축옥사로[[계축옥사]]로 인목대비의[[인목대비]]의 아버진 김제남이 사사되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관직을 떠나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두문불출하고, 중국의 전적(典籍)과 자기의 견문을 토대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사정,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지식을 소개한《[[지봉유설]]》(1614년)을 지었다.<ref name="송건호"/>{{Rp|306}} (→[[조선의 대외 관계]])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공신|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616년 [[순천부|순천]][[부사]]에 임명되어 발령되었는데,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서궁에 유폐되기까지 하자, 지방관 임기 3년을 마친 후에는 관직을 사양하고 [[수원]]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줄 108 ⟶ 112:
 
== 이수광의 사상과 철학 ==
본래 총민강기(聰敏强記)하여 기억력이 뛰어났던 이수광은 그 때 중국에 들어가서 주자학이 아닌 새로운 학문체계가학문 체계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받았고, 천주교 그래서교리서인 천주실의를[[천주실의]]를 처음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ref>이준구, 강호성 공저, 《조선의 선비》 스타북스(2006) 203쪽 {{ISBN|899243300X}}</ref> 이수광의 철학적 특성은 [[성리학|도학]]의 정통성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의 이론적 천착에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라, 인격과의 구체적 실현을 추구하는 실학정신의 발휘에로 지향하고 있어서,<ref name="역대" />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ref>{{뉴스 인용 |제목 =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url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2100119 |출판사 = 동아일보 |날짜 = 2007-02-10 |확인날짜 = 2008-11-13 }}</ref>
 
또한 [[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제 소임을 못하고 권신, 재상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질타, 탐관오리를 탄핵해야 한다고 말하며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은 남달리 청빈해야 하며, 검소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
줄 115 ⟶ 119:
당대에 단아하고 염정하며, 또 문학에 재주가 있었다<ref>광해군일기 36권, 광해군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2월 22일(계사) 11번째기사 "이수광·장만·유공량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는 평가가 있다.
 
[[실학]]의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실학]]의 길을 연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그 당시까지만 해도 [[월남]]의 존재는 [[사대부]]와 지식인 이외에는 모르는 이도 많았으나 그와 [[조완벽]]의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조선]]사회에 월남(베트남)이라는 국가를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 내에서 [[베트남]]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베트남에 관한 글을 쓴 이수광과 베트남에 다녀온 [[조완벽]]은 조선 사회에 베트남이라는 국가의 존재와 풍습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