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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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전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국지도발]]
|그림=1996 NK sub.jpg
|장소= [[강원도]] [[강릉]]
|skfWk= [[1996년]] [[9월 16일]]- [[1996년]] [[11월 5일]]
|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승조원 1명 생포, 24명 사망(15명 사살)<br />'''한국''' 18명(군인 12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4명) 사망, 27명 부상
|교전국1=
{{국기|대한민국|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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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역상자 한국 전쟁}}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江陵地域武裝共匪浸透事件)은 [[1996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상어급 잠수함]]이 [[강릉시]] 부근에서 좌초된 후 잠수함에 탑승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26명이 강릉 일대로 침투한 사건이다. 이에 대한민국 육군은 49일간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수의 잠수함 승조원들과 대한민국 군인, 민간인들이 사망하고 승조원 1명이 생포되었다.<ref name="동아_1">96년 강릉 침투사건, 《동아일보》,
1998.6.23</ref> 육군 28개 부대, 해군 1개 함대, 공군 1개 전투비행단, 수십만의 예비군, 경찰병력이 참여한 이 작전은 평균 일일 전투병력 4만 2천, 연일 전투인원은 150만에 이르는 거대한 작전이였다. 하지만 군인 12명, 예비군 1명, 경찰 1명, 민간인 4명이 사망하였고 부상자는 27명이며 민간 손실액은 2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1060020914501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1-06&officeId=00020&pageNo=45&printNo=23359&publishType=00010 "강릉 무장간첩 침투사건 기록들"], 《동아일보》, 1996.11.6</ref><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8660854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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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생포된 간첩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북한은 1994년부터 간첩 활동에 [[잠수함]]을 투입하였고, 1995년 9월에는 [[서귀포시|서귀포]]의 간첩 침투를 지원하기도 했다.<ref name="경향_18">"北「간첩 잠수함」 94년부터 침투", 《경향신문》, 1996.9.21</ref>
 
무장공비 요원 중 총책임자인 김동원 대좌의 존재로 인해 이 임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임무임을 알 수 있는데 김동원 대좌는 해상처장이며 그 해상처장이기 이전에 이미 '''공화국 2중 영웅'''으로 장래가 매우 촉망되는 고위 군관이었다. 참고로 공화국 영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핵심계층]] 중에서도 아무나 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위치에 있는 직함이며 공화국 영웅 1회 수여 하나만으로도 바로 신분이 [[병사 (군사)|전사]]에서 [[장교|군관]]으로 변경될 정도이다. 이 대단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수여한 인물이 김동원 대좌이다.
 
이 임무의 진짜 목적은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인 [[김영삼]]을 암살하는 것이다.<ref>[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968 생포간첩 이광수 "침투 목적은 대통령 암살"]</ref> 이 무장공비들은 [[1996년]] [[10월 7일]]에 [[춘천시]]에서 [[1996년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을 한다는 첩보를 입수했으며 그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까지 알아낸 상태였는데 그래서 이들 무장공비들은 강릉까지 잠수함으로 침투한 이후 강릉에서 춘천까지 도보로 이동 후 춘천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뒤 전국체전 개막식에 참석해서 [[김영삼]] [[대통령]]을 저격할 계획이었다. 도보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작전 일자보다 3주일 정도 전인 [[1996년]] [[9월 13일]]에 [[원산항]]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원래 항해요원은 전투요원을 강릉에 상륙시킨 뒤 복귀하는 것으로 임무가 완료되었으나 그들이 탑승한 잠수함이 강릉에서 정박이 아닌 좌초를 당한 탓에 원산항으로 되돌아갈 방법이 아예 없어졌으며 이로 인해 항해요원들도 작전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결국 전투요원들이 항해요원들을 총살시키게 되었다.
 
1996년 2월 초, 동해에서 한국과 미국의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다.<ref name="한겨레_1">한미해군 연합 기동훈련, 《한겨레》, 1996.2.10</ref> 4월 4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북한은 남한 내에서 시행된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불만을 표하면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와 관련된 규정들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수일 간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ref name="동아_2">北"비무장지대 불인정", 《동아일보》, 1996.4.5</ref><ref name="한겨레_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북한이 문제삼고 있는'남한 군사활동', 《한겨레》, 1996.4.8</ref> 일부에서는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식량난으로 인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붕괴의 가능성과 흡수통일이 논의되고 있는 것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의북한내의 위기의식이 표출된 것으로 보고, 확전의 위험성을 예측하였다.<ref name="동아_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부의북한내부의 최신정보, 《동아일보》, 1996.4.12</ref>
 
4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경비정 2척이 [[북방한계선|서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기동훈련을 실시하였고,<ref name="동아_4">"판문점도발 연장아니냐"촉각, 《동아일보》, 1996.4.21</ref> 5월 17일에는 중부전선에서 무장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군북한군 7명이 비무장지대를 넘었다가 돌아갔다.<ref name="동아_5">무장北韓軍 7명 군사분계선 침범, 《동아일보》, 1996.5.18</ref> 5월 23일 새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경비정 5척이 서해 북방 한계선을 넘었고,<ref name="동아_6">北경비정 5척 침범 어제 새벽, 《동아일보》, 1996.5.24</ref> 6월 14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경비정 3척이 북방 한계선을 넘었다.<ref name="매경_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고속경비정 3척 한때 북방한계선 넘어, 《매일경제》, 1996.6.15</ref>
 
8월 14일에는 미군과 러시아군이 동해 북쪽 두만강 국경 부근 연안에서 합동으로 상륙과 구조 및 운송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한반도의 유사시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었다.<ref name="한겨레_3">동해북부서 미·러 합동 군사훈련, 《한겨레》, 1996.8.19</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북한은 1996년 초부터 미군의 유해 송환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9월 21일에는 미국의 대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북한을 방문할 계획이었다.<ref name="동아_7">"北-美 관계개선 極祕합의", 《동아일보》, 1996.1.7</ref><ref name="한겨레_4">리처드슨 21일 재방북, 《한겨레》, 1996.9.12</ref>
 
== 사건 경위 ==
=== 함정 및 탑승자 ===
;상어급 잠수함
보도에 의하면, 상어급 잠수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북한에서 1986년부터 자체적으로 개발하였고, 사건 당시 10척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ref name="경향_1">어뢰장착 요원침투용, 《경향신문》, 1996.9.19</ref>
 
[[상어급 잠수함]]은 길이 23.5m, 폭 3.7m에 325톤급으로, 수상 7노트, 수중 12노트로 항해가 가능하다. 승조원은 11명이고, 10명이 추가로 승선할 수 있다. 무장으로는 어뢰 4발과 기뢰가 있다. 선체는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레이다나 음향탐지기로 탐지하기 어려우며, 잠수 및 부상 속도가 빨라 비정규전이나 특수공작에 이용된다.<ref name="동아_8">작전수심 100m…특수공작용 北잠수함 제원, 《동아일보》, 1996.9.1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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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 인원
대한민국 국방부와 국가안전기획부의 발표와 증언에 의하면, 잠수함에 탑승한 인원은 모두 26명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인민무력부 정찰부 소속으로, 대좌와 상좌 등 고위급 장교를 포함하며, 소위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f name="동아_11">무장간첩 파장 고위장교 왜왔나 6.25후 침투론 최고계급, 《동아일보》, 1996.9.21</ref> 그중 19명이 승조원인 것으로 파악되었다.<ref name="경향_10">무장간첩 침투 6인의 정체·행적 공작원 3명 투수임무 받은 要員, 《경향신문》, 1996.9.21</ref>
 
=== 좌초 및 침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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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성명
대한민국의 국방부는 대변인 성명에서 이 사건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대남도발이며 중대한 정전협정 위반 사항이라고 발표하였다.<ref name="경향_7"/>
 
=== 검거 및 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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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 분석 및 논란 ==
=== 원인 ===
생포된 승조원은 잠수함이 기관 고장을 일으켰다고 주장하였으나, 대한민국의 군당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북한이 무장간첩을 남파한 것으로 보았다.<ref name="한겨레_5">북 의도 뭔가 무장간첩 침투 미국과 직접접촉 노린 충격요법, 《한겨레》, 1996.9.19</ref>
 
; 침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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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군당국은 생포된 승조원이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인 점, 표류로 보기에는 해류의 속도가 느린 점을 들어 좌초된 잠수함이 무장간첩을 침투시키고 귀환하려던 중 좌초한 것으로 추측하였고, 남북간 대화 거부를 부각시켜 미국과의 대화를 유도하기 위해 간첩을 파견한 것으로 보았다. 일부에서는 남북관계의 경색을 그 원인으로 추측하였다.<ref name="한겨레_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북한은 이에 대하여 9월 23일 인민무력부 담화를 통해, ‘원산항을 출발한 잠수함이 훈련중 표류하였으며, 강릉 앞바다 해안에서 좌초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표하였다.<ref name="동아_9">北 인민무력부 담화 〈全文〉, 《동아일보》, 1996.9.24</ref>
 
;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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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 ===
잠수함의 침투와 한 발 늦은 수색으로 경비 태세의 허점과 신속하지 못한 대응이 지적되었다.<ref name="매경_2">구멍뚫린 육·해상 방어망, 《매일경제》, 1996.9.19</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북한이 한국과 국제 사회의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무장 간첩을 남파한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ref name="경향_8b">溫情 대가가 무장間諜인가, 《경향신문》, 1996.9.19</ref>
 
표종욱 일병은 간첩에게 잡혀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군 당국은 계속 표종욱 일병이 군무이탈 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공비를 사살한 이후 공비 중 한 명이 표일병의 전투복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표 일병이 공비에게 사살된 것을 인정했다. 실제로도 표일병의 시신은 속옷과 양말만 착용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사망 원인은 [[교수형|교수]]에 의한 질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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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송환
1996년 12월 2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북한은 이례적으로 잠수함 사고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재발 방지 노력을 약속하는 공식적인 사과 성명을 발표하였고,<ref name="매경_4">사과성명 전문, 《경향신문》, 1996.12.30</ref> 그 다음날인 12월 30일 사망한 24명의 시신이 판문점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북한에 송환되었다. 이들 시신은 통상 적군묘지에 안장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북한의 송환 요구로 보관하던 중 화장하였다. 생존자에 의해 확인된 유골에는 이름이 붙여졌고, 나머지는 키와 몸무게와 혈액형을 기재하여 식별할 수 있게 하였다. 이날 있었던 시신 송환은 남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남북한 사이의 첫 시신 송환으로 기록되었다.<ref name="동아_16">간첩유골 첫 판문점송환 기록, 《동아일보》, 1996.12.31</ref> 추후 사망한 24명의 유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북한으로 이송되었으며 이들은 전원 공화국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이 중 김동원 대좌의 경우, 이미 공화국 2중 영웅이었기 때문에 급이 더해져 공화국 3중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공화국 영웅은 공화국 4중 영웅은 김일성과 김정일 뿐이며 공화국 3중 영웅도 이미 사망한 김동원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급이 높아봤자 공화국 2중 영웅에 불과하다.
 
;통일공원
1997년 7월, 국방부는 사고 현장에 공원을 조성하여 좌초된 잠수함을 영구적으로 전시할 것을 발표하였다.<ref name="경향_6">강릉침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잠수함북한잠수함 현지에 영구 보존전시, 《경향신문》, 1997.8.1</ref>
 
;편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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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공비 명단 ===
* 대좌 김동원: 해상처장. 공화국 2중 영웅 신분이며 9월 18일 동료들에게 총살됨. 사후 소장으로 추서되고 공화국 3중 영웅이 됨.
* 상좌 김강훈: 해상부처장. 9월 18일 동료들에게 총살됨. 남측에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북한에서 '[기록영화] 위대한 동지 5 당을 받드는 길에 인생의 영광이 있다'에 이 당시 무장공비 명단을 발표하고 공화국영웅으로 추서하는 과정에서 확인됨.
* 중좌 정영구: 함장. 9월 22일 국군에게 사살됨. [[수류탄]]을 맞고 사살된 탓에 시체가 갈기갈기 찢어짐.
* 중좌 만일춘: 기관장. 9월 19일 국군에게 사살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