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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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회는 [[948년]]에 죽고, 고종회의 3남 [[고보융]](高保融)이 뒤를 이었다. 그때 중원은 후당이 멸망한 후 [[후진 (오대)|후진]], [[후한 (오대)|후한]], [[후주]]의 순서대로 정권이 교체되고 있었다. 고보융은 후주에 대해 신하를 자청하였고, [[954년]] 남평왕에 봉해졌다. 그후 후주의 세종(世宗;[[시영]])에 의한 통일사업이 시작되고 후당이 [[남당]]을 공격하려고 할때 고보융도 동조하여 병사를 보냈다. 그다음 후주에서 [[송나라]]로 선양이 이루어지자, 송나라에도 신하를 자청했다.
 
고보융은 [[960년]]에 죽고, 고종회의 10남 [[고보욱]](高保勗)이 형남절도사의 지위를 이었다(왕위를 얻지 않은 것을 국주라고 부른다). 고보욱은 무의미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향락을 즐겼기 때문에 민심이 떠났다. 고보욱은 [[962년]]에 죽고, 고보융의 장남 고계충(高繼沖)이 형남절도사의 지위를 이어받았다.(고보욱과 같다) 그후 송나라 태조가 통일사업을 개시하자, 가장 약소하지만 중요한 요충을 차지하던 형남이 최초의 목표가 되었다. 고계충은 [남쪽의 초나라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라는 송나라측의 요구에 굴복하여 통과를 허락했으나, 송나라군은 영내을 통과하던 중 형남에 대해서도 항복을 요구하여 [[963년]] 형남은 멸망했다. 고계충은 그후 카이펑으로 옮겨져, 송나라의 절도사로서 천수를 누리다 [[973년]]에 죽었다.
 
이에 관련하여 [[만사휴의]](萬事休矣)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고종회가 고보욱을 너무나 아껴 고보욱이 안하무인이 되었던 일을 주위 사람들이 탄식했다는 말에서 나온 고사성어이다.(출전은 [송사형남고씨세가](宋史荊南高氏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