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다 히사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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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의 성적은 침체되고 있었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팀메이트인 아다치 미쓰히로를 본보기로 삼아 새로운 [[구질]]과 [[싱커]]를 연구하고 있었다. 당초 야마다는 직구 중심의 피칭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 아다치의 싱커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지만, 아다치는 “직구가 통용될 때는 싱커는 던지지 말아라”라고 말해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다는 아다치가 자주 던지는 싱커를 몰래 동작을 취하는 등 매일 같이 연구를 거듭하여 이후에 아다치도 마지막에는 힌트를 가르쳐 주게 되었다. 구종인 싱커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에 시즌 최다인 26승을 기록하여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7구원승 포함이라 최다 선발승은 야마우치 신이치(20선발승)에게 돌아감) 팀의 에이스 투수로서 부활했다. 데뷔 이후 통산 두 번째의 다승왕 타이틀(모두 최다 선발승과 거리가 멈)을 획득하면서 그 해부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인 3년 연속 MVP(3년 연속 MVP를 달성한 것은 야마다 외에 [[스즈키 이치로|이치로]])를 석권했다. 1979년 통산 세 번째인 21승(19선발승)을 기록하여 3년 만에 다승왕 타이틀(최다 선발승으로 치자면 첫 번째)을 획득했다.
1982년 4월 29일, [[지바 롯데 마린스|롯데 오리온스]] 전에서 언더핸드 투수로서는 [[미나가와 무쓰오]]에 이은 개인 통산 200승(당시 160선발승)을 달성(200선발승은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인 12년 연속 개막전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기록 경신이 걸려있는 1987년에 한큐의 개막전 선발 투수는 [[사토 요시노리 (1954년)|사토 요시노리]]였는데 그 해의 스프링 캠프와 시범 경기에서 예전에 비해 컨디션이 떨어졌지만 시범 경기에서 컨디션이 오르지 않은 것은 예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야마다 본인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에다 감독이 언론에서 “올해의 야마다는 평상시와는 다르다”라고 말한 것을 알아채며 “감독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같은 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의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상대로 개인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지만 시즌 성적이 7승으로 끝나면서 17년간 계속되었던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당시 10선발승 이상 - 71년 17, 72년 16, 73년 12, 75년 12, 76년 19, 77년 14, 78년 16, 79년 19, 80년 10, 81년 11, 82년 14, 83년 14, 84년 13, 85년 17, 86년 14)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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