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 안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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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행동이 정숙하고 참신하여<ref name="lhw">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6~117, {{ISBN|9788950918941}}</ref> [[정현왕후|자순대비 윤씨]]의 눈에 들어 대비의 후원으로 스무 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ref name="lhw"/> 후궁이 되었고, [[1520년]](중종 15년)에는 정5품 상궁에 배수되었다. [[1529년]](중종 24)에는 종4품 [[숙원]](淑媛)에 올랐으며, [[1540년]](중종 35) [[숙용]](淑容)까지 그 지위가 올랐다.<ref name="lhw"/> [[1544년]] [[11월 15일]] 중종이 57세로 승하하시자, 3년 복제를 마치고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에 물어나 거처하기를 청했으나, 평상시 품행이 단정한데다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와의 사이도 돈독하여 특별히 궐에서 머물도록 명하였다. 그 후 1549년(명종 4) 10월 18일 우연히 사제에 갔다가 갑자기 51세로 졸하였다. 다음 해 [[3월 8일]] 양주 장흥리에 장사지냈다.
 
중중과의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영양군 (왕족)|영양군]]을 1521년에 생산하였고, [[정신옹주 (중종)|정신옹주]]를 1526년에 낳았다. 그리고 1530년 3월 5일에는 선조대왕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대원군|덕흥군]]을 낳았다. 둘째 아들인 이이수는이수는 조졸하였으며 생몰년은 미상이다.
 
안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세상을 떠나자 명종비 [[인순왕후]]는 안씨의 자손인 하성군을 즉위시켰다.<ref>이한우,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21세기 북스, 2009, p.118, {{ISBN|9788950918941}}</ref>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그녀의 후손들이다. 선조는 재위 10년째인 1577년 3월 24일 소용 안씨를 창빈으로 추봉하였는데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