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공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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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 공원에서는 [[1916년]] 이후 각종 무술대회, 집회 등의 장소로 쓰였으며, [[1933년]] 12월에는 일제 강점기 동안 가장 높은 [[일본의 국기|일장기]] 게양대(102 [[자 (단위)|척]])<ref>약 31[[미터]]</ref> 가 세워졌다. 당시 남포동으로 달리던 [[노면 전차|전차]]가 일본신을 모신 용두산 신사 앞을 지날 때면 전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용두산을 향해서 큰절을 해야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090000&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110627000076|제목=[김열규 교수의 '내 부산, 내 옛 둥지'] ⑧ '나가테 도오리'(광복로) 야시장에서|출판사=부산일보|저자=김열규|출판일자=2011-06-27|확인날짜=2011-07-26}}</ref>
 
용두산 신사는 [[신사참배]]를 강요한 [[1935년]] 이후 [[부산]]에서 일본인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광복절|광복]]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멀쩡하게 남아 [[만주]]에서 귀환선을 타기 위해 부산으로 모여든 일본인들의 집결소로 쓰이고 있었다. [[1945년]] 11월 17일 토요일 오후 6시 민영석(당시 36세)에 의해 불태워졌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sectionId=1010090000&subSectionId=1010090000&newsId=20070127000180|제목=[문화 들춰보기] ③ '용두산 신사' 방화범은…|출판사=부산일보|저자=박종호|출판일자=2007-01-27|확인날짜=2011-07-26}}</ref>
 
노후화된 시설 및 정비를 위해 [[2008년]]에 민간자본을 통한 재창조 사업을 공모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백지화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용두산공원 재개발 사업 주민들 반대로 ‘백지화’|url=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321537.html|날짜=2008-11-12|저자=이수윤기자|출판사=이수윤기자|확인날짜=2011-06-15}}</ref>
 
 
 
 
 
== 연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