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군 (왕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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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은 어릴 적 강수 아기(康壽阿只)라는 이름으로 불렸다<ref name="gangsu"/>. 양평군은 [[조선 문종|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유일한 아들인 [[정미수]]의 집과, 어머니 숙의 이씨의 일가 친척인 이손의 집에서 성장하였다<ref name="gangsu"/><ref>《조선왕조실록》중종 37권, 14년(1519 기묘 / 명 정덕 14년) 11월 9일(기해) 4번째기사</ref>. 양평군은 이손을 "아비"라고 부르기도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중종 19권, 9년(1514 갑술 / 명 정덕 9년) 1월 24일(무자) 3번째기사</ref>.
 
그러나 1506년(연산군 12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이 폐위되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ref>《조선왕조실록》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 1년) 9월 2일(무인) 1번째기사</ref>. 당시 양평군은 이손의 집에 있었는데, 이손은 반정 세력이 양평군을 잡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몰래 자신의 가족들로 하여금 양평군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그날 [[오시]]가 지나면서 양평군의 유모와 보모들이 반정 소식을 듣고는, 양평군을 [[영춘군 (왕족)|영춘군]]<ref>[[조선 세종|세종]]과 [[신빈 김씨]]의 아들 [[영해군 (왕족)|영해군]]의 장남이다. 《조선왕조실록》성종 80권, 8년(1477 정유 / 명 성화 13년) 5월 5일(신미) 3번째기사</ref>의 집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반정 세력들은 이내 양평군을 찾아내어 수안군<ref>지금의 [[황해북도]] [[수안군]].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8967&mobile&categoryId=1588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수안군〉] 참고</ref> 으로 유배를 보냈다<ref name="gangsu"/>.
 
이후 [[유순]], [[박원종]] 등의 반정 세력들은 연산군의 아들들인 [[이황 (폐세자)|폐세자 이황]], [[창녕대군]], 양평군, [[이돈수]] 등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당시 중종은 연산군의 아들들이 모두 나이가 어리니 큰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들을 죽이는데 반대하다가, 이내 반정 세력의 주장에 꺾여 결국 이들을 1506년(중종 원년) 음력 9월 24일 모두 사사하였다<ref name="in"/>. 이때 양평군의 나이 9세였다<ref name="gangsu"/>.
 
한편 양평군의 부왕 연산군은 반정이 일어나고 약 2달 후인 1506년(중종 원년) 음력 11월 6일 유배지인 [[교동현]]<ref>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65416&mobile&categoryId=200001077 두산백과 〈교동현〉] 참고</ref> 에서 사망했다.
 
== 양평군 사칭 사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