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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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등단 ===
[[1913년]] [[서울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방정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상업학교 [[공부]]보다는 신문화 흡수를 위한 [[독서]]에 주력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최남선]]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올 때에 데려온 인쇄 자모(필름인쇄 이전에는 자음과 모음 글자판으로써 인쇄했고, 지금도 쓰이고 있다.)와 인쇄 노동자 2명과 함께 서울에서 운영한 출판사에서 발간한 어린이잡지인 《소년》, 《붉은 저고리》를 탐독했다고 한다. [[1917년]] [[최남선]]이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현상문예 선외가작에 뽑힘으로써 등단하였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에서 3학년 2학기 [[한국 문학|국어국문학과]] 교과서로서 펴낸 《한국근현대문학사》에서도 [[1917년 퓰리처상|1917년]]을 소파 방정환 선생이 문학동네에 등단한 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던 중 [[졸업]]을 1년 앞두고, 당시 담임교사와 [[부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모처(향리 인근 도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독학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훗날 소파가 "선린상업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조선은행]] 서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기억할 정도로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이다.
 
=== 천도교와의 만남 ===
[[1915년]] 생활비 조달을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에서 취직하여 서류 필사 업무를 하였는데(일급으로 임금을 셈함),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국은 [[토지조사사업]] 즉, [[조선인]]의 토지수탈작업을 담당하여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던지라 곧 사직하고 마는데, 이때 함께 일했던 유광렬과[[유광렬]]과 뜻이 맞아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한다. [[1917년]]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었던 [[천도교]]인 권병덕의 천거로 [[천도교]] 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인 손용화 여사와 중매 [[결혼]]하였다. 그 뒤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보성전문학교에[[보성전문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 천도교청년회의 핵심 활동가로 부각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그 무렵 청년 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여기서 구락부는 Club의Clu,b의 일본식 음역이다.)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문예지 [[신청년]](1919~1920)을 편집 발행하는데 관여했으며, 청년운동가이자 선린상업학교 학생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문학가로서 열성을 보였다.
 
=== 독립신문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