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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시대]]의 관백 [[니조 요시자네]](二条良実)는 동생 [[이치조 사네쓰네]](一条実経)에게 관백 직위를 물려주고 [[내람]](内覧, [[일본 천황]]에게 올리는 문서와 천황이 재가한 문서 일체를 먼저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역직)에 임명되어서 태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 자손인 [[니조 요시모토]](二条良基)는 13년에 걸쳐 관백직을 지내어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가문의 당주가 관백이 된 뒤에도 태합을 칭하여 내람으로서 권세를 누려, 그 뒤 세 번이나 섭정에 재임명되었다.
가장 유명한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서, [[1591년]]에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관백직을 물려준 뒤 태합을 칭하였다.
근세에 태합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 히데요시 뿐이었기 때문에 태합이 고유명사로 오해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전임 섭정 또는 전임 관백 등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쓰이는 명사이다. 사서에서는 히데요시를 도요토미(豊臣) 성에서 따온 풍태합({{Ruby-ja|豊太閤|ほうたいこう|호타이코}})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전국 규모로 실시한 검지(検地, 토지조사)는 당시부터 태합검지(太閤検地)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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