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누엘 칸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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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lang|de|Johann Georg Kant}}, 1682–1746)와 어머니 아나 레기나 칸트({{lang|de|Anna Regina Kant}}, {{small|[[혼인 성씨|혼전 성씨]]:}} 로이터·{{lang|de|Reuter}}, 1697–173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 자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11명 자녀 가운데 어른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4명뿐이었다). 칸트는 '에마누엘'(Emanuel)이란 세례명을 받았으며, [[히브리어]]를 공부하고서 '이마누엘'(Immanuel: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ref>[[신약성서]] [[마태복음]] 1:23</ref>)로 바꾸었다.<ref>만프레트 퀸(Kuehn, Manfred). 《칸트 전기》(Kant: A Biography).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p. 26</ref> 그는 삶을 통틀어서 단 한번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00마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지 않았다.<ref>릭 루이스(Lewis, Rick). 2007. <칸트 200주년>('Kant 200 Years On'). "지금 철학"(''Philosophy Now''). No. 62.</ref> 그의 아버지는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북쪽 도시인 [[메멜]]에서 이주한 독일인 [[마구]](馬具) 제작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ref>{{웹 인용|url=http://www.koenigsberg-is-dead.de/I_Cosmopolis.html |제목=국제 도시(Cosmopolis) |출판사=쾨니히스베르크는 죽었다(Koenigsberg-is-dead.de)|날짜=2001-04-23 |확인날짜=2009-07-24}}</ref> 칸트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스코틀랜드식영어식("Cant")으로 적곤 했다.<ref>http://www.csudh.edu/phenom_studies/western/lect_9.html</ref> 어렸을 때 칸트는 돋보이지는 않았으나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의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칸트가 받은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 라틴어와 종교였고, 엄격하고 가혹한 훈련을 강조한 것이었다.<ref>전기 정보 출처: 만프레드 퀴엔(Kuehn, Manfred).《칸트:전기》(''Kant: A Biography.'')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 2001. {{ISBN|0-521-49704-3}}</ref>
 
[[파일:Alte Universität Koenigsberg.jpg|섬네일|200px|왼쪽|쾨니히스베르크의 옛 대학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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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전기 작가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Gedanken von der wahren Schätzung der lebendigen Kräfte'')이라는 졸업논문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자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수년에 걸쳐 지방 귀족가문의 가정교사 생활하면서 홀로 철학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 12일]],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Allgemeine Naturgeschichte und Theorie des Himmels'')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Principorum primorum cognitionis metaphysicae nova dilucidatio)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법|자연법]], [[신학|자연신학]], [[윤리학]] 등 여러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첸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 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사이 칸트는 원하던 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직을 얻었으며, 이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1770년)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10여 년간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1780년대에 일련의 중요한 저서, 즉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무엇인가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 1784),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6)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점점 명성이 올라갔다. 그리고 《[[순수이성비판]]》(초판:1781년, 재판:1787년), 《[[실천이성비판]]》(1788), 그리고 《[[판단력비판]]》(1790)에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칸트는 한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Vom radikalen Bösen in der menschlichen Natur'')란 제목으로서 당시의 [[계몽주의|계몽주의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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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 철학 ==
{{칸트주의}}
칸트는 [[18세기]] 철학에 있어 가장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실제로 칸트 이전의 철학과 이후의 철학은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칸트가 초감각적인 세계를 논하는 기존의 형이상학과는 다른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체계를 세우려고 했으며, 그러한 체계의 근거가 되는 [[인식론]]을 연구하여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식론에 바탕을 두고 두 사상의 한계에서 벗어난 철학을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이성이 이성 자신을 비판하는 철학이다.<ref name="김석수서문ㄴ">{{서적 인용|저자=임마누엘이마누엘 칸트|공저자=김석수 옮김|제목=순수이성비판 서문|출판사=책세상|연도=2002|쪽=128, 132}}</ref>
 
=== 비판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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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가 바라본 칸트 ===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는 그의 스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인용문2|사고를 위한 이마는 침착한 유쾌함과 기쁨의 자리였다. 말에는 풍부한 사상이 넘쳐흘렀고 농담과 재치가 장기였다.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떤 음모나 편견 그리고 명성에 대한 욕망도, 진리를 빛나게 하는 것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유혹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부드럽게 강요했다. 내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다해 부르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마누엘 칸트이다.}}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