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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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에는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국공내전 이전에는 [[1945년]] 종전부터 [[장제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후에는 철거.), 양쪽에는 각각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세계인민대단결 만세"({{zh|s=中华人民共和国万岁 世界人民大团结万岁|t=中華人民共和國萬歲 世界人民大團結萬歲}})라고 쓰여 있다(1949년 건국 당시에는 [[정체자]]로 "중화인민공화국 만세 중앙인민정부 만세"({{zh|order=t|t=中華人民共和國萬歲 中央人民政府萬歲|s=中华人民共和国万岁 中央人民政府万岁}})라고 쓰여 있었으나, 그 다음 해인 [[1950년]]에 오른쪽의 구호가 현재의 내용으로, [[1956년]]부터 왼쪽 구호의 '萬'과 오른쪽 구호의 '團'과 '萬'이 [[간체자]]로 바뀌는 과도기를 거치다가 [[1964년]]부터는 [[간체자]]로 완전히 바뀌었다. 또 [[1970년]]에는 목제에서 금속제로 바뀌었다.).
 
천안문을 그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중국 근현대사의 중대사들이 많이 일어난 장소인데, 1925년에 중화민국의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는 천안문에 [[쑨원]]의 초상화가 걸렸으며, 1945년에는 [[일본 제국|일본]]에 맞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총통이었던 [[장제스]]의 초상화가 걸렸다. 1949년 7월 7일에는 [[중일 전쟁|2차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주더]]와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으며, 1949년 10월 1일 이래는 오직 마오쩌둥의 초상화만 걸렸다. 초상화는 매년 교체되며, 지금까지 마오쩌둥 이외 인물의 초상화가 천안문에 걸린 경우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1953년에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그를 기리기 위하여 잠시 스탈린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적이 있다.
 
[[타이완|타이완 섬]]의 중화민국 측에서 당시 [[마잉주]] 총통의 측근이 중국 통합의 의미로, 그리고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하며 하루 동안만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내리고 쑨원의 초상화를 걸어놓자고 제안하였으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이를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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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사고 ===
초상화의 무게는 2톤에 달하며, 훼손당할 때마다 새로 붙여진다. 1989년의 [[1989년 톈안먼 사건|톈안먼 사건]] 때에 분노한 학생들이 계란으로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훼손하였는데, 이후 이 학생들은 감옥으로 보내졌고 17년 후인 2006년에 출소하였다. 2007년 5월 12일에는 한 실직자에 의하여 불이 붙었는데, 이로 인하여 초상화의 15% 가량이 불에 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재복구되었다. 2010년 4월 5일에는 한 항의 시위자가 잉크 병을 던져 초상화 주변 벽을 맞추었다. 이 시위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당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