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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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본 천황|천황]]을 알현하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민심이나 황실 분위기 때문에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데라우치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2대 조선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천황 알현의 중대 사안은 모두 하세가와에게 맡긴다는 말을 남겼고, 하세가와는 대한제국 황제의 천황 알현을 직접 지휘하여, 처음에는 [[이완용]]을 시켜서 성사시키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후 하세가와는 윤덕영을 통하여 이를 추진하였다. 윤덕영은 [[덕수궁]]에 머물던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일주일간 대면을 통하여 압박하였는데, 고종이 피곤하여 누우면 윤덕영은 별실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종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결정을 독촉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윤덕영은 [[이왕직]] 차관 {{임시링크|[[고쿠부 쇼타로|ja|国分象太郎}}]]와 공모하여 당시 이왕직 장관인 [[민병석]]의 동의와 하세가와 총독의 뜻에 따라 덕수궁 내의 [[십보기구]]를 정리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덕수궁 내의 크고 작은 창고부터 고종의 신변의 문고서함까지 엄밀히 검사하여 개개마다 봉인을 붙였고, 또 이 물건들을 보관하던 상궁을 파면하여 궁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크게 분노하였으나, 윤덕영은 [[상시사장]]의 직권이라고 말하였다.
 
또 윤덕영은 당시 30여 년이 지난 일도 들추어내었다. 그것은, 30여 년 전 [[명성황후]] 사후 왕후를 다시 맞기 위하여 김씨 가문의 규수가 간택 확정되었지만 왕실 사정에 의하여 30여 년간 규방에 머물고 있던 일이었다. 윤덕영은 이 일을 고종에게 꺼내며 고종을 압박하였는데, 매일 오후 2~3시 부터 오전 2시 무렵까지 고종 앞에 똑바로 서서 움직이지 않은채 고종이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윤덕영은 당시 47세가 된 김씨 규수를 덕수궁에 입궁시켰으나 고종은 정화당이라는 당호만을 내리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결국 천황 알현을 허락하였는데, 자신 대신 [[창덕궁]]에 머물던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알현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