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셰갸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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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성의 문제 ==
예셰갸초는 즉위 기간 내내 정통성의 문제에 시달렸다. 그는 종교적 지식이 풍부했고 도덕적으로도 뛰어났지만, 원래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는 1717년 [[오이라트부|오이라트]]인들의 침입을 받았다. 당시 티베트를 지배하고 있던 예셰갸초의 지지자들은 모두 오이라트와의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오이라트인들이 티베트를 지배하게 되자 예셰갸초는 정식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판첸 라마와 승려들은 예셰갸초와 그의 자식들만큼은 죽이지 말라고 간언하였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이라트인들의 통치는 172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0년, 강희제가 오이라트인들의
1725년, 게샹갸초는 법회에서 그를 추모했고, 다시는 이와 같은 대립 달라이 라마가 나와서는 안됨을 명시했다. 다만 후에 예셰갸초의 환생자 한 명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 아이가 어릴 적에 천연두로 죽으면서 예셰갸초를 섬기는 신자들은 모두 없어지고, 예셰갸초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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