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조약: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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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은 병탄의 방침을 [[1909년]]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미 확정해 놓고 있던 상태였다. 다만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제적 명분을 얻는 일만 남겨두었다. 일본 제국 정부는 [[일진회]]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에게 ‘병합청원’의 시나리오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송병준]]은 이에 앞서 [[1909년]] 2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매국흥정을 벌였다. 여러 차례 [[이토 히로부미]]에게 ‘합병’을 역설한바 있었으나 일본 제국 측의 병탄 계획 때문에 일이 늦어지게 되자 직접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서 [[가쓰라 다로]] 총리 등 일본 제국의 조야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흥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송병준의 이런 활동을 눈치채고 통감부 외사국장 {{임시링크|[[고마쓰 미도리|ja|小松緑}}]]와 조선 병탄 문제의 교섭에 나섰다. 이완용은 일본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일본 제국에 유학했던 [[이인직]]을 심복 비서로 삼아 미도리와 교섭에 나서도록 했다.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송병준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송병준 내각이 성립된다면 보복당할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합방의 주역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은 “현 내각이 붕괴되어도 그보다 더 친일적인 내각이 나올 수 없다.”면서 자기 휘하의 내각이 조선 합방 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