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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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봉건제: 농노와 영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주군과 영주 사이의 관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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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계층적인 관계는 휘하 영주 및 기사들의 봉건법 상의 충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휘하 대영주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대영주를 능가하는 직할령의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86233&cid=40942&categoryId=31622 봉건제도의 사회구조] 두산백과</ref> [[프랑스]] [[카페 왕조]] 초기의 상황이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국왕으로 영주들에 의해 선출된 [[위그 카페]]는 [[일드프랑스]] 지역의 영주로 다른 대영주를 압도할 수 있는 권력이 부족하였고 사실상 일드프랑스와 [[오를레앙]] 지역만 다스릴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 [[노르만 왕조]]는 정복을 통해 형성된 강력한 권력과 함께 본거지인 [[노르망디]] 지역의 힘을 바탕으로 대영주를 압도할 수 있었다.
 
혈연에 기초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던 중국의 봉건제와 달리 유럽의 봉건제는 혈연이 아닌 '''쌍무적 계약 관계'''로 통제력을 확보했다. 주군은 보호를 제공하고 가신은 충성을 제공한다는 상호간의 의무를 기초로 계약을 맺는 것으로 농노와주군과 영주 사이의 관계가 이에 해당했다. 영주와 상위 영주 간에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계약이지만 세부적으로 영주는 세금과 일정 기간의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고 상위 영주는 토지([[봉토]])를 제공하는 관계였다. 봉토의 소유권과 충성 계약은 세습되었으며, 혼인과 상속을 통해 이전될 수 있었다. 또한 쌍무적 계약이었으므로 의무가 지켜지는 한 영주의 거취는 자유로웠으며, 이를 통해 여러 명의 상위 영주를 섬기고 다수의 봉토를 받는, 혹은 혼인과 상속을 통해 다수의 봉토를 획득함으로써 여러 명의 상위 영주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국왕조차도 이러한 혼인과 상속을 통해 직할령 혹은 직속 영주를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충성을 맹세한 상위 영주가 다수이다보니 군사적 봉사를 제공할 때 어느 영주를 우선으로 두는지에 대한 계약 관계가 따로 존재하기도 했다.
 
=== 봉건 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