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히데마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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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마사'''({{llang|ja|中川秀政|なかがわ ひでまさ}}, [[에이로쿠]] 11년([[1568년]]) ~ [[덴쇼]] 20년 [[[음력 10월 24일]]([[1592년]] [[11월 27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이다. 아버지는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 [[분고 국분고국|분고]](豊後) [[오카 번오카번]](岡藩) 초대 번주인 [[나카가와 히데시게]](中川秀成)의 형이다. 처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딸 쓰루히메(鶴姫)가 있다. 관위는 우에몬후(右衛門尉)이다.
 
== 생애 ==
아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노부나가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를 섬겼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사쿠마 노리마사]](佐久間盛政)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자, [[셋쓰국|셋쓰]] [[이바라키 성이바라키성|이바라키]](茨木) 5만 석의 영주로 대를 이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고,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웠기 때문에 [[하리마 국하리마국]] [[미키 성미키성|미키]](三木) 6만 5천여 석에 가증이봉된다.
 
[[1587년]] [[규슈 정벌]], [[1590년]] [[오다와라 정벌]], [[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갔다. [[수원]] 부근에서의 [[매사냥]] 중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향년 25세에 [[작전 중 사망|전사]]했다. 이런 탓에 히데요시의 질책과 영지가 몰수될 것을 우려해 은폐하였지만 도리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화를 돋구었다. 하지만 아버지 기요히데의 공적을 고려해 동생 히데시게로의 영지 상속을 윤허했다.
 
단,《[[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평수정(平秀政/平秀正)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 [[명나라|명]]에 호송된 후<ref>선조 113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5월 24일(신미) 1번째기사</ref>, 사형에 처해졌다<ref>선조 116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8월 9일(을유) 3번째기사</ref>고 전해진다.
 
== 같이 보기 ==
* [[이바라키 성이바라키성]]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