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비아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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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details|이탈리아 전역 1524년-1525년}}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선출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국왕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을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과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의 새 명칭)의 세력강화, 그에 편승한 [[부르봉 공 샤를 3세]]의 반기에 직면한 프랑수아 1세는 왕권강화을왕권강화를 위해 이탈리아 지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고전해 프랑수아 1세가 직접 [[롬바르디아]]에 침공해 파비아성을 포위했다. 이에 대항해 카를 5세는 구원을 위해 군을 파견하여 양군이 [[파비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 진행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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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1월 란누아는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15,000명의 란츠크네히츠를 지원받고 공격을 재개했다. 다발로스는 산 안젤로의 프랑스군 기지를 점령하고, 파비아와 밀라노 사이의 프랑스군 연락망을 끊었다. 란츠크네흐츠도 벨지오조소로 진군해 마을을 점령했다. 2월 2일경에는 란누아는 파비아에 접근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1세의 병력은 대부분 성벽으로 둘러싸인 미라벨로 평원에 주둔하고, 레이바의 수비군과 란누아의 지원군 사이에 포위군을 배치했다. 소규모의 전투가 한달내내 계속되면서 이 과정에서 메디치가 큰 부상을 입고 부대를 이끌고 피아첸차로 퇴각하고 만다. 때아닌 전력손실로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의 주둔군을 소환해 손실을 만회했지만 소모전만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2월 21일 황제군 지휘관들은 물자 고갈과 프랑스군의 수적 우위을우위를 보고 안전한 퇴각을 위해 프랑스군을 향해 기습전을 벌이려 한다.
 
=== 전투 ===
[[Image:Battle of Pavia, oil on panel.jpg|250px|right|thumb|''파비아 전투'' 이름모를 [[플랑드르]] 작가가 그린 16세기 오일 판넬.]]
2월 23일 저녁 야음을 틈타 황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황제군은 포위망에 포격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주의를 끄는동안 페스카라가 지휘하는 기병대을기병대를 시작으로 5개 보병대와 2개 기병대가 북상했다. 북쪽의 얕은 강을 건넌 기습부대는 아침 5시경 알폰소 다발로스 지휘하의 화승총병 3천과 경기병대가 미리 공병에 의해 파괴된 성벽틈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황제군 기병대를 발견한 프랑스 기병대간의 교전이 시작되면서 스위스 장창병이 프랑스군을 돕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6시 30분경 데 바스토의 부대와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6천의 란츠크네흐츠 용병부대와 맞부딪치면서 7시경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란누아가 인솔한 스페인-황제군 중갑기병대와 다발로스 휘하의 스페인 보병대는 숲속을 뚫고 서쪽으로 이동해 프랑스군 야영지을야영지를 급습했다. 프랑스군은 그동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다가 7시 20분경 포격준비를 하던 프랑스 포병대에게 발각되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프랑수아 1세는 아군의 배후에 적이 육박해 오는것을 알고 중갑기병대를 보내 황제군을 일단 격파했다. 그러나 프랑스 중갑기병대의 무모한 돌격은 포병대의 포격을 방해했고, 기병대와 보병부대 사이의 거리를 너무 벌려놓았다. 다발로스는 퇴각한 황제군을 재정비하고, 샤를 3세, 프룬즈베르크, 데 바스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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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망을 구축한 프랑스군은 병력집중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군의 반격은 소수병력을 차례로 투입하게 되어 황제군 주력부대인 [[테르시오]]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반격을 지원하던 포병도 사태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여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황제군은 병력의 집중과 기동력을 살려 프랑스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군은 완전한 횡대가 아니었기에 황제군 기병대을기병대를 막지 못했다. 양군 모두 포격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기에 승패를 결정지은건 보병부대의 소총병의 운용법이었다. 이 전투로 이탈리아 전쟁은 제 2기를 맞이하게 되고, 프랑스의 세력은 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