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 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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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베루스 황조 '''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세베루스 1세]]가 [[로마 황제 연대표|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서 성립되어, [[235년]]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세베루스 2세]]가 살해당하면서 소멸한 [[로마 제국]]의 황조이다.
 
== 역사 ==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에 그가 죽자 즉위한 큰 아들 [[카라칼라]](재위 [[211년]] ~ [[217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뒤를 이어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즉위했으나 [[235년]] 암살당하고 군인 [[막시미누스 트락스|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세베루스 황조]]는 무너졌고 로마 제국은 이후 1세기간 혼란에 빠지게 된다.
 
== [[세베루스 황조|황조가 배출한 황제들]] ==
=== 제1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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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황제 [[게타]] ([[209년]] – [[211년]])
* [[카라칼라]] ([[211년]] - [[217년]])
 
=== 비 세베루스 가문 ===
* [[마크리누스]] ([[217년]] - [[218년]])
 
=== 제2기 ===
* [[엘라가발루스]] ([[218년]] - [[2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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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로마 제국]]
[[분류:193년 성립]]
[[분류:235년 해체]]
 
[[bg:Севери (династи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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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everiske dynasti]]
[[de:Severer]]
[[en:Severan dynasty]]
[[es:Dinastía Severa]]
[[eu:Severar lei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