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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익부인 조첩여'''(鉤翼夫人 趙婕妤, ? ~ [[기원전 87년]])는 [[전한 무제|무제]]의 후궁이다. [[전한 소제 (8대)|소제]]의 생모였다.
 
== 생애 ==
젊어서부터 깨끗함 청정함을 좋아했으며, 소녀 시절 6년 동안 병으로 앓아 누운 뒤 오른쪽 손이 오그라들었다고 한다. 음식도 조금밖에 먹지 않았다. [[전한 무제|무제]]의 눈에 들어 입궁하였고 그의 총애를 받아 임신 14개월만에 아들 [[유불릉|전한 소제]]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전설에는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아들을 출산하면서 무제는 조첩여를 더욱 총애하였다. 비록 그는 이전에 이미 10명의 자녀가 있고, 황위계승자로 지목된 태자도 일찍 정하였지만 [[여태자]]와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창읍애왕]] 등 다른 자녀를 계승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한무제는 늙어서 자식을 얻은데다가 구익부인의 뱃속에서 14개월 또는 24개월만에 나온 아들이라 각별히 산후조리를 보살폈다. 아들의 출생을 기념하여 특별 조회를 연 한무제는 예전의 요(堯)임금의 어머니가 꼭 14개월, 또는 24개월간 회임하였다가 낳았다는 고사를 말하며 학사들에게 명하여 구익부인의 산방(産房)에 "요모문(堯母門)"이라는 글을 짓게 했다.
 
== 사망 ==
[[기원전 87년]] 구익부인은 역모의 주모자로 고변되었고 한무제는 구익부인에게 자결을 명한다.
 
[[기원전 88년]] 장성한 아들인 [[창읍애왕]]마저 죽자, [[전한 무제|무제]] 구익부인 조씨 소생 [[유불릉|전한 소제]]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고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여태후]]일족의 세도 폐해를 알던 한무제는 어린 아들 뒤에 젊은 어미가 있으면 외척의 발호와 폐단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구익부인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였다.
 
[[전한 무제|무제]]는 조첩여가 자결한 뒤에 복권시켜 주었다.
 
== 같이 보기 ==
* [[전한 무제|무제]]
* [[여태자]]
* [[전한 소제 (8대)|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