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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년]] 요흥은 걸복건귀을 완주로 돌려보내어 姚碩徳의 후량 원정에 종사시켰다.같은해 姚碩徳는 후량의 수도 고장을 공격해 항복시키고 후량에 연금되었던 [[구마라습]]을 상안으로 데려왔다. 또한 [[후량 (오호십육국)|후량]]이 항복한 것에 하서 여러정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서량]], [[북량]], [[남량]]은 뒤이어 후진에게 종속했다. 이로써 하서는 후진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402년]] [[북위 (북조)|북위]]는 다시 오르도스로 진출해 후진과 적대관계에 들어갔다. 같은 해 북위군이 후진의 영토에 침입한 것을 계기로 요흥은 관중, 하동의 병력을 북위로 보냈으나 주력이 시벽(산서성 양분현)에서 북위군에게 포위당해 대패했다. 이로 인해 후진의 하북 진출은 좌절되었다. 403년 약체화 된 후량은 겨우 정권을 유지했으나 후진 영토로 이주했고, 대신 후진이 고장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같은 해 동진이 환현에 의해 찬탈당하자 후진은 이 기회을 노려 다시 회하이북을 석권했다. 또한 405년 姚碩徳이 진령을 넘어 후구지를 항복시켰다. 이 시점에서 후진은 최대영토을최대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405년]]말 환현을 물리치고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는 그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영토을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나섰다. 유유는 후진에게 한수 유역의 12군을 돌려줄것을 요구하였고,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승낙했다. 406년 남량의 압력에 굴복해 양주 고장을 양도하게 되어 하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407년]] 산동의 남연과 사천의 후촉은 동진의 유유에게 압력을 받았기에 후진에게 종속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렇게되자 후진은 동진과의 대결을 피할수 없었다. 같은해 후진에게 복속했던 후구지가 동진에게로 넘어갔다. 한편 후진국내는 407년 오르도스에서 [[혁련발발]]의 하와 409년 농서에서 걸복건귀의 서진이 자립하게 되어 국력이 급속히 쇠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