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디다르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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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almado.jpg|섬네일|200px|[[김명국 (조선)|김명국]]의 달마도]]
 
'''보디다르마'''({{llang|ta|போதிதர்மன்}}, {{llang|sa|बोधिधर्म}}, [[생몰년 미상]]) 또는 '''보리달마'''(菩提達磨, {{zh|t=菩提達摩|p=Pútídámó}}), '''달마'''({{zh|t=達摩|p=Dámó}})는 [[남인도]] 출신의 [[타밀인]] 승려로, [[선종]]의 창시자인 동시에 초대 조사이자 [[인도 불교]]의 제28대 조사이다. 남인도의 [[팔라바국]] 왕자로 태어나 왕족의 허울을 벗어던져버리고 북위의 불제자로 귀화하였으며,<ref>양현지(楊衒之),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 547년.</ref> 160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이 있으나 자세한 생몰년은 기록이 없다. 무예를 한 승려라는 전설도 있다.
 
== 전설에 나오는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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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煌文獻. 莫高窟을 위시한 둔황 일원 석굴 유적에서 발견된 고대 한문 · 산스크리트어 · 위구르어 · 소그드어 · 구자어 · 호탄어 · 티베트어 · 몽골어, 히브리어로 쓰인 문헌 대부분은 사본이지만, 『金剛經』처럼 일부는 인쇄본도 있기에 『둔황사본』이라는 통칭은 부당하고 문서는 다분히 사료나 서적과 구별되는 서류라는 뜻으로 사용되므로 둔황 석굴 유적에서 나온 典籍 다량은 포괄할 수가 없어 이것도 지양해야 해서 문서나 사본 전반을 갈무리해 학술 연구에서 典據나 참고가 될 만한 자료인, 3%에서 4%만이 연대가 표기된 둔황문헌은 4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중 80%에서 90%는 9세기 이후에 작성됐다. 둔황문헌 내용은 다종다양하지만, 불교 문헌이 압도해서 거의 90%를 차지한다. 한문과 티베트 문자로 쓰인 불교 문헌에서도 불경 사본이 가장 많다. 『金剛般若波羅密經』 사본이 1000여 점에 달하듯이 같은 경전이 숱하게 중복된다.
불경 다음으로는 도교 문헌이 많고 유교 문헌도 1% 이상 있다. 史籍으로는 『史記』, 『漢書』 『文選』, 『甘棠集』, 『往五天竺國傳』을 위시해 다수한 필사본 殘簡이 끼어 있다. 둔황문헌에서는 문서가 각별히 주목을 끈다.
고문서 전통이 거의 없는 중국으로서는 소중히 간수해야 할 문헌이다. 사원 승려 명부, 재산 등록부, 收支 장부, 戒牒[징계장] 등 사원 관련 문서가 1000여 점이나 되어 당시 불교 사원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일반 주민과 관련된 문서로는 호적, 役務 臺帳, 물자 징수 장부, 매매ㆍ대여, 고용상 계약서, 가산 분할이나 양자와 이혼, 노예해방 같은 일상에 관한 證書가 있다. ※출처: 정수일 선생, 『실크로드 사전』, 창비, 2013. 10.31.</ref> 중에 보이는 몇몇 기록에서의 보리달마도 인도 불교에 지대히 영향받아 중국에서 발흥한 종교인 선종에서 추존하는 보리달마와는 사상과 수행하는 방법과 이론·논리 구조가 전혀 다르다.
 
보리달마가 [[소림사]] 일대인 허난성 송루어에 머문 문헌상 시점은 북위 시대 초 孝文帝 즉위 10년인 486년에서 孝文帝 즉위 19년인 495년이지만 당시 허난성 송루어에는 [[소림사]]라는 사찰은 있지도 않았으므로<ref>『魏書』 제114 권 「釋老志」</ref> 보리달마는 [[소림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듯이 보리달마를 다룬 이야기는 후대 선종이 득세하면서 보리달마를, 선종을 상징하는 인재로 追尊하고자 꾸며낸 여러 가지 전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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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김용의 소설 등장인물]]
[[분류:선불교의 조사]]
[[분류:종교 창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