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2 로켓: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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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육군 로켓연구소 소장 [[발터 도른베르거]]는 오베르트 박사의 수제자인 19세의 폰 브라운을 영입하여 1933년부터 A-1, 2, 3, 4, 5 로켓을 연속적으로 개발했고 그 중 A-4가 V2로 불리게 된다. V2에서는 V는 바로 보복을 뜻하는 'Vergeltung'를 의미한다. 제공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연합군에 보복무기의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부여한 이름이다.
 
V2의 비행 및비행과 유도원리는 수직과 수평방향의 균형을 잡아주는 자이로스코프를 설치하여 스스로 평형을 유지할수 있도록 하였으며 초기 모델은형은 영국까지의 비행시간을 산정하여 아날로그 [[컴퓨터]]에 입력하면, 아날로그 컴퓨터가 알아서 엔진을 멈추는 형식이었다. 후기 모델부터는형부터는 지상에서 무선명령을 통해 유도했다고 한다.
대체적으로 개발한 로켓의 목표는 가까운 곳에 있었던 영국이다.
 
V2의 비행 및 유도원리는 수직과 수평방향의 균형을 잡아주는 자이로스코프를 설치하여 스스로 평형을 유지할수 있도록 하였으며 초기 모델은 영국까지의 비행시간을 산정하여 아날로그 [[컴퓨터]]에 입력하면, 아날로그 컴퓨터가 알아서 엔진을 멈추는 형식이었다. 후기 모델부터는 지상에서 무선명령을 통해 유도했다고 한다.
 
기존 V1에 비하면 훨씬 진보한 무기기술이었다. 게다가 뉴욕을 공격하기 위해 2단 로켓으로 개량을 계획하기도 했다.
 
주 연료는 의외로 메탄올을 사용했는데 이는 만성적인 석유부족에 시달리던 독일에게는 등유나 경유 같은 석유계 이외의 연료를 사용할 필요가수가 있었고, 메탄올을 사용함으로서 따로 냉각재를 쓸 필요가 없어서 1석2조의 효과가 있었다없었다. 몸체는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서 발사 중량를 줄이도록 설계되었다. 어차피 로켓은 지속적으로 연료를 연소시키며 날아가기 때문에 중량은 계속 감소하고 속도는 더더욱 빨라지기 마련이다.
 
1944년 9월부터9월 8일부터 3,000 기000발 이상의 V-2가 발사되었다. 가장 먼저 공격받은 곳은 [[런던]]이었고 이어 [[앤트워프]], [[리에주]] 등도 공격받았다. 2011년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V-2 공격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수는 민간인과 군인을 합쳐 9,000 명 가량이고, V-2 개발 과정에서 강제 동원된 노동자 및 수용소 입소자 12,000 여명이 사망했다.<ref>''Am Anfang war die V2. Vom Beginn der Weltraumschifffahrt in Deutschland.'' In: Utz Thimm (Hrsg.): ''Warum ist es nachts dunkel? Was wir vom Weltall wirklich wissen.'' Kosmos, 2006, S. 158, {{ISBN|3-440-10719-1}}</ref>
 
독일이 패망함에 따라 연합국 각국(미국, 영국, 소련)은 독일의 유도탄, 로켓, 제트엔진, 핵이 실험된 장소 및 샘플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을 비롯한 100 명 이상의 V-2 핵심개발진은 미국에 투항했다.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하여 V-2 개발진 상당수가 [[미육군]] [[레드스톤 조병창]]에서 일하게 되었다. 미국은 V-2의 하드웨어도 노획하여 80여 기의 유도탄을 생산했다. 소련은 V-2 생산 시설을 접수했고, 재생산된 V-2들을 소련으로 가져갔다.